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8.03.13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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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고찰에 관한 레포트
목차
Ⅰ.머리말
Ⅱ. 양한에 대한 예속
Ⅲ. 조위와의 충돌
Ⅳ. 모용씨와의 쟁탈
Ⅴ. 북위와의 공존
Ⅵ. 수당과의 항쟁
Ⅶ.맺음말
본문내용
Ⅰ.머리말
고구려는 한의 현도군 경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정권이 탄생한 날부터 중국과는 종종 인연을 맺었다. 고구려정권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중국과의 교류와 왕래도 빈번해지고, 각종 모순도 잇달아 드러났다. 그 중에는 중국 북방민족 정권들과의 갈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과 투쟁은 당시의 상황하에서 시종 중국 각 민족간의 내부 모순과 투쟁으로도 나타났다. 700여 년에 달하는 긴 기간 동안, 중국정권이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던간에 고구려는 중국정권에 대한 예속관계를 철저히 벗어나지 못하고, 중국정권의 관할 아래서 중국 북방의 割據정권의 하나가 되었다. 漢魏의 공손씨 정권, 兩晋의 慕容씨 정권, 남북조의 탁발씨 魏정권 등과 같은 성질이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된 중앙정권과 계속 모순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흥망성쇠에 중국정권의 영향과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정권과의 관계를 어떻게 순조롭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고구려정권의 존재와 발전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고구려의 역대 통치 계급은 거의 모두 정권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외부를 향한 약탈과 확장을 중요한 노선으로 삼았다. 이는 중국정권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분쟁을 도발하여 병력이 대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의 강대하고 통일된 중앙집권 통치가 출현하면 통치계급은 늘 고구려에 대한 관할을 적극적으로 강화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약속을 받아내거나 위축시켜 그 세력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것이다.
한편 중국의 정치가 전란으로 인해 소용돌이에 말려 불안해져 변방의 일에 힘을 기울일 틈이 없게 되면, 고구려의 통치자는 그 기회를 틈타 외부로의 발전을 꾀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순환, 반복되고 강․온건책이 연속되는 속에서 통치자들은 700여 년을 이어왔던 것이다.
漢에서 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통치정권은 고구려에 대한 무력 위협을 감소 또는 해소시키기 위해 늘 강경과 온건을 병행하는 민족정책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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