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고조선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근대 한국의 영토변천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I. 서론
1. 조사의 목적 및 의의
II. 고조선의 중심지에 관한 논쟁
1. 고조선의 중심지이동설과 강역의 유추
III. 고구려에서 발해까지의 북방 영토 확장
1. 문자명왕(文咨明王)의 고구려 최대 영토 구축
2. 발해의 고구려 계승, 북녘으로의 영토 확장
IV. 고려의 북방정책과 요동정벌
1. 고려 주도의 통일 한반도, 북부 지역의 권역 수복
2. 강동 6주 확보와 동북 9성의 의의
3. 공민왕의 요동정벌과 요동성의 탈환
V. 한반도 경계의 완성과 조선의 북진 정책
1. 세종(世宗) 주도의 북방 영토 개척
VI. 맺는 글
본문내용
I. 서론
1. 조사의 목적 및 의의
국가의 요소는 크게 국민과 주권, 그리고 영토로 구성된다. 전쟁의 역사라고도 불리는 인류사에서 영토는 전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중요한 요소였고, 대부분의 전쟁은 영토 차지를 위하여 발발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영토는 과거를 비롯하여 현재까지도 강대국의 조건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으며, 광활한 영토는 국력의 상징이었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이 광개토대왕을 민족의 자부심으로 여기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고구려는 실제로도 강력한 국력을 지닌 국가였지만 우리가 흔히 고구려를 강대국이라 여기는 이유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탄생한 방대한 영토 때문이다. 고구려라는 존재는 강대국이라는 열망을 가진 우리 민족에게 열강(列強)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영웅적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식민사관을 제작하였고, 한국사를 타율적이며 비자주적으로 규정지었다. 이들은 반도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사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무시한 채 한국사를 반도에 고착시켰다. 반도사관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잔재하고,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한국사를 수동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 가지 예시로, 중국은 반도사관을 자국의 동북공정에 이용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반도에 한정 짓고, 고구려와 발해 등을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사료와 문헌들을 기반으로 하여 한민족의 역사적 무대가 단순히 반도만이 아니었음을, 고구려와 발해를 포함한 우리 역사의 자주적인 영토 변천을 명확히 인지할 필요성이 있다. 필자는 한반도로부터 북방으로의 영토 변천과 조선의 4군 6진 개척으로 인한 한반도의 북부 경계선 확립까지 이에 관하여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김기섭,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 한국고대사연구 50 (2008)
김종복, 발해정치외교사 (n.p.: 일지사, 2009)
노태돈, "5·6세기 동아시아의 國際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 동방학지 (1984)
배동수, "제 1 연구 주제 : 북방정책 수립을 위한 학문적 접근 : 조선 세종의 북방정책," 한국 북방학회논집 8 (2001)
서영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한국사시민강좌 2 (1988)
이정신, "고려 태조의 건국이념의 형성과 국내외 정세," 韓國史硏究 제118호 (2002)
오기승, "공민왕대 동녕부 전역(戰役) 고찰," 군사연구 Vol.- No.134 (2012)
윤경진, "고려 동북 9성의 범위와 ‘公嶮鎭 立碑’ 문제," 歷史와實學 第61輯 1 (201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p.: 한국학 중앙 연구원, (1991)
池內宏, "「夫餘考」 및 「勿吉考」," 滿鮮史硏究 上世 (1979)
김가람, "신라와 발해의 영토 완성과 경계," (석사, 연세대학교, 2018)
『고려사』 권96 열전 권제9 제신(諸臣)
『고려사절요』 권2 성종문의대왕 성종 12년 10월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고종 21년 6월 17일
『자치통감』 권113 晉紀 安帝 元興 3년(404) 12월조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n.d. 수정, 2020년5월1일 접속, http://bitly.kr/MvjgbUV8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