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국사 교과서의 현대 부분에서 몇가지 논의가 되는 쟁점을 잡아
일일이 교과서와 여러 대안 서적 읽고 비교 분석하여 쓴 레폿입니다!
도움 되실꺼예요;)
목차
1. 한국 전쟁
(1) 연구동향
(2) 교과서 분석
(3) 수업 속에서의 역사
2. 4.19 혁명
(1) 연구 동향
(2) 교과서 분석
(3) 수업 속에서의 역사
3. 박정희 신드롬
(1) 연구 동향
(2) 교과서 분석
(3) 수업속에서의 역사
*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Ⅲ. 박정희 신드롬
(1) 연구 동향
① 박정희신드롬의 발생과 배경
1997년 3월, 몇 개 일간지 귀퉁이에 『고대신문』에서 실시했던 한 설문조사 결과가 실렸다.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로 김구, 테레사 수녀에 이어 박정희가 6표를 얻어 3위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가장 복제하고 싶은 않은 인물’로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39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는 같은 신문의 또 다른 내용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 내용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뒤이어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직무를 가장 잘 수행한 대통령’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75.9%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의 직무수행능력에 대한 지지는 전두환의 6.6%보다 더 낮은 3.7%를 기록했다. “박정희 신드롬”은 이렇듯 무능한 현직 대통령과 대비되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유능한 전직대통령에 대한 갑작스러운 기억 형태로 등장했다.
여론조사와 언론ㆍ출판매체를 통해 박정희신드롬이 확산되어가자 그 동안 은밀하게 추진되던 박정희 추모 사업들이 공개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박정희의 고향인 구미시는 80역원을 들여 부지 1만 평에 건평 1,000여 평의 규모로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키로 했다고 발표했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박대통령 내외와 직접ㆍ간접으로 인연을 맺었던 인사들은 4월 25일 ‘박정히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약칭 정영회)’를 결성했다. 박정희신드롬의 등장과 확산 속에서 이제 박정희 예찬은 공개적인 것이 되었다.
박정희신드롬의 확산의 가장 극적인 모습은 정치권에서 이루어졌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그들은 급속한 확장세를 보였던 박정희신드롬에 적극 편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선 김종필의 자민련이 박정희의 적자임을 내세웠다. 박정권이 경제성장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닦았고, 5ㆍ6공이 이를 발전시킨 바탕 위에 문민정부화가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내각제를 통해 이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김종필이었던 만큼 그의 주장은 아예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7월 4일 신한국당 대선 경선주자의 대구지역 유세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다. 박정희와 별 관계없던 후보들이 갑작스럽게 박정희신드롬에 편승하고자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인제 후보는 “나는 박 전 대통령과 닮았으며 키가 1밀리미터도 틀리지 않는다.”고 말했고, 이수성 후보는 “21세기형 박정희 리더십을 보여주겠다.”고 주장했으며, 이한동 후보는 “정통 보수인 나만이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계승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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