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민족운동의 비교 이광수와 신채호
- 최초 등록일
- 2008.01.08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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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20년대 민족운동세력의 분화와 관련하여
이광수와 신채호에 대해 비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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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진보적 민족인텔리의 동향은 대체로 프랑스혁명의 자유인권 및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민족자결권 투쟁의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차대전 말에 있어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 선언은 한국의 민족인텔리들에게 지대한 정치·사상적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다. 또한 레닌의 볼셰비키혁명에 의한 러시아 노농정권의 출현도 민감한 지식인들에게는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3.1운동에 이르기까지의 민족운동의 지도정신은 본질적으로 소위 부르조아 민족주의였다. 민족 인텔리의 대부분은 거의 모두가 지주 및 귀족 가문의 특권계층이었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민족운동의 지도정신은 반일독립을 핵심으로 하는 시민적 민족주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역사발전과 결부된 그들의 제약성 때문에 광범위한 민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비조직적인 산발성과 체념적 유약성을 나타내게 된다. 여기에는 민족개량주의와 민족혁명주의의 사조가 있었는데, 전자는 주로 신교육과 신지식 곧 서구문물의 도입에 의한 민족적 실력배양을 목표로 한 것이었고 후자는 군사훈련과 민족무력양성 및 테러에 의한 직접행동을 주안으로 한 것이었다. 민족개량주의의 입장을 취하던 인물들 중 대다수가 사회진화론적인 인식이 가진 한계성으로 인해 이후 대부분 친일화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고, 민족혁명주의 사조는 이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 진영등으로 분화되게 된다. 춘원 이광수와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개량주의 세력과 민족혁명주의 계열을 대표할만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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