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의 내각제도
- 최초 등록일
- 2007.11.25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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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대의 내각제도에 대한 리포트
목차
1. 명의 건국
2. 전제군주독재체제
3. 내각의 성립 발전
본문내용
1. 명의건국
이민족왕조인 원에 대한 반란의 와중에서 일어나 명을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은 안휘성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탁발승으로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고생 끝에 원 말 백련교도의 반란군의 일파인 곽자흥군에 투신했다. 곽자흥이 죽은 후 그 휘하 부대를 장악한 주원장은 근거지로 남경을 확보하고 학자와 지식인들을 받아들이면서 백련교로부터 유교로 돌아섰다. 주원장은 휘하의 몽고 토벌군이 승전을 올리는 가운데 1368년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명으로 정하고 연호를 홍무라 했다. 홍무제는 원의 마지막 황제를 몰아내고 북방정벌을 통해 만주를 확보한 후 캐러코룸으로 도망가 있던 북원까지 멸망시키고 1391년에는 운남을 병합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2. 군주 독재 전제 정치의 확립
홍무제(1328-1398)는 향촌의 안정과 더불어 황제의 전제적 권력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우선 원의 제도를 답습했던 행정기구를 개혁해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지방 최고행정기구로 중앙의 중서성에 속해 있던 행중서성을 폐지했다. 대신 포정사사와 도지휘사사, 안찰사사를 두어 각각 민정, 군정, 사법을 맡겨 황제에게 직속시켰다. 이는 중서성의 기능을 축소하면서 동시에 지방분권적 성격이 강한 행중서성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중서성의 권한을 축소하려는 일련의 조치는 호유용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중서성을 폐지한 데서 절정에 달했다. 중서성의 좌승상이었던 호유용은 주원장과 동향의 건국동신으로, 명의 건국 후 중서성을 비롯한 중앙의 관리를 비롯해 지방관, 상인, 강남의 토호, 대지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모반을 꾀하기 위해 북원과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입증되지 않은 이유로 호유용이 모반죄로 체포, 처형되고 이와 연루해 관리, 강남 대지주 등이 1만 5천여 명이나 처형되었다. 명 태조는 황제독재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중서성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에 직속시켰다.
참고 자료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2006
박한제 외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