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집권기의 농민과 천민의 봉기
- 최초 등록일
- 2007.10.30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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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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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무신집권(武臣執權)기는 정치적(政治的) ․ 경제적(經濟的)인 면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社會的)으로도 많은 혼란(混亂)이 야기된 시기였다. 이른바 민란(民亂)으로 불리는 농민(農民)과 천민(賤民)의 봉기(蜂起)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농민(農民)항쟁(抗爭)의 역사에서 민중들의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이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기처럼 앙양(昻揚)된 시기는 그 유례가 드물었다.
이러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특히 명종 ․ 신종조의 30여 년간이었는데, 그러나 그 같은 민란(民亂)의 선행(先行) 단계라 할 수 있는 백성(百姓)들의 유민화(流民化)는 이미 예종조부터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토지(土地)제도가 문란(紊亂)하여 졌을 뿐더러 농민들에게 과다한 세역(歲役)을 부담시켰으므로 많은 백성들이 농토(農土)를 잃고 떠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지방 수령들의 심한 탐학(貪虐)은 이를 한층 조장하는 요소로도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성들의 유민화(流民化) 현상은 인종과 의종조에 들어와 더욱 격화되면서 유민(流民)은 도적 내지는 유적으로 변하여 많은 소요를 일으켰다. 이러한 현상이 무신정권(武臣政權)기에 접어들어 마침내 대규모의 민란(民亂)으로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런 농민, 천민(賤民)의 봉기(鳳旗)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중앙통치체제의 문란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무신정권(武臣政權)이 성립하기 이전의 정치적(政治的) 상황을 살펴보면, 인종대에 집권층(執權層) 내부의 권력 다툼이 표면화됨으로써 중앙집권(中央集權)체제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은 인종대 이래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중앙집권(中央集權)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해 이에 위배되는 여러 귀족들을 숙청하였으나, 문신(文臣) 지배층의 압력과 그 자신의 방탕한 생활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도리어 의종은 사치와 향락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을 강화하였으므로 농민들의 유망(有望)이 더욱 늘어났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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