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
- 최초 등록일
- 2007.10.20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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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번에 대한민국 건국에 관하여 파워포인트로 발표한 것 입니다.
시험기간에 한 것이라 미흡하긴 하지만 내용이 풍부합니다. 사진도 많이 첨부하였고요~교수님께서도 다른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으시다고 말씀 하셨고요, 과정별로 정리해놔서요 파워포인트가 아닌 워드로 옮겨 하셔도 무방할 것 입니다.
목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방이 오기까지…….(배경)
-카이로회담, 테헤란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38선 획정과 8.15광복
대한민국수립과정
전문가들의 평가 -이인수 박사의 평-
결과
이번을 계기로 느낀 점
자료출처
본문내용
8.15 해방과 38선
미·소 간에 전후 한국문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의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 협정에 따라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면서 일본군은 급속히 무너졌다. 소련군은 당초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 관동군을 쉽게 격파하면서 제1극동 방면군 산하 제25군 소속의 보조 공격부대가 10일 한반도에 진주하여 12일에는 웅기와 나진, 14일에는 톈진에 진격했다. 당시 오키나와까지 진격했던 미국은 소련군이 급속히 남하하고 일본의 항복선언이 확실해지자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군사점령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38선 분할안을 제기했다. 미국 육군부 작전국 정책과의 C.H.본스틸 3세와 D.러스크 대령이 기안하고, 국무·육군·해군 등 3부 조정위원회 안으로 제기된 38선 분할안은 8월 13일 합동참모본부의 동의와 14일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15일 맥아더 명의의 일반명령 제1호로서 공포되었다. 소련은 얄타 회담 때부터 사할린과 만주지방의 이권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38선 분할 제안을 별 이의 없이 수락했다. 이에 따라 자유주의 진영의 맹주로 등장한 미국과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소련군에 의한 국토분단 유도
소련군은 일거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북한전주 완료한 데 이어 자기들이 점령한 북한 지역을 미군 점령 지역인 남한으로부터 분리하는 조치를 취했다. 소련군은 우선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한간의 교통, 통신, 상거래를 차단했다. 소련군이 취한 이러한 남북한 지역간의 교통, 통신 단절조치는 미군이 남한지역에 진주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취해진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의미를 갖는다. 소련군이 이처럼 북한 진주와 동시에 교통, 통신을 차단한 데 이어 한국인 공산주의자 및 그 동조들에게 북한 각 지역의 행정권을 넘겨줌으로써 장차 남북한간의 정치적 이질화-분단을 초래할 결정적인 원인을 조성했다. 소련군은 자기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한국인들에게 동산주의자 및 그 동조들의 주도하에 임시위원회를 구성토록 하고 그 임시위원회로 하여금 북한 각 지역의 행정권을 맡도록 하면서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도록 고취했다.
좌·우익의 분열
신탁통치 결정안이 국내에 전해지자 임시정부 세력 주도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반탁운동은 즉각적인 독립을 당연시한 한국민들의 민족감정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또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주장했다는 왜곡보도가 널리 퍼지면서 반공·반소 운동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이하 생략)
참고 자료
대한민국건국사(개정신판) -해방3년의 정치사 ,양동안| 현음사| 200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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