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광개토 대왕비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06.05.10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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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 대왕비에 대해서 목차에 따라 분석하고
자신의 느낌을 쓴 레포트입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목차
1, 광개토 대왕비의 발견
2. 광개토 대왕비에 기록된 내용
3 일본의 치밀한 해석 과정
4. 우리나라의 대응
5.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
본문내용
1, 광개토 대왕비의 발견
서기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 대왕비는 대략 1880년을 전후하여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 서적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발견된 광개토 대왕비는 처음에는 수풀에 묻혀있었다고 합니다. 개간에 종사하던 청나라 농부가 우연히 발견해서 신고했고, 당시의 집안현 지사가 명령하여 비석에 낀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서 불을 놓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비문이 손상된 것은 물론입니다.
이전의 우리나라 저서에서도 광개토 대왕비는 종종 등장합니다. 그러나 세종 대의 『용비어천가』에서는 금나라의 황릉이라고 표기하는 등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도 일반의 소문대로 위치만 표시 했을 뿐, 자세한 기록은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2. 광개토 대왕비에 기록된 내용
광개토 대왕비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장에서는 고구려의 개국과 광개토대왕의 등극과 승하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다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정토기사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영토 확장과 세력을 넓힌 공적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신묘년 기사는 바로 제 2단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수묘 기사로서 광개토대왕 사후 대왕의 능을 수호하는 일, 즉 수묘의 책임을 명확히 기록한 부분입니다. 수묘 기사에는 광개토대왕 자신이 영토 전쟁중에 탈취한 한족 ․ 예족 가운데서 3분의 2를 충당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고구려인으로 충당한다는 내용과 330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습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