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자유중국의 성립자, 모택동의 라이벌이었던 장개석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장개석의 생애
1) 4.12 사건
2) 만주사변
3) 국민당의 위초공격
4) 서안사건
5)제2차 국공합작
6) 국공내전
7) 대북천도
Ⅲ. 장개석의 사상
1) 훈정지배
2)안내양외
3)왜 공산당을 밀어내려고 했는가
Ⅳ. 宋家
Ⅴ. 마치며
장개석은 왜 패배하였는가.
본문내용
중국동맹회 시대의 ‘3서’는 ‘군법의 치, 약법의 치, 헌법의 치’인 것을 <中華革命黨總章> 에서는 “본당 진행의 질서는 세 시기로 나눈다”라고 하여, 그 삼단계를 군정- 훈정 - 헌정으로 개칭하고, 혁명달성을 위한 과도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군정과 훈정의 두 시기는 혁명당에 의한 일당독재시기이다. 혁명당이 국민정부를 조직하고, 국민정부를 운영하여 군정시기와 훈정시기를 통괄한다. 군정은 군정부의 건설이며, 군사독재권이 중앙과 지방을 통괄하는 것으로, 의회정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사적 통일이 완성되고, 반혁명의 위험이 없어지면, 군정을 끝내고 훈정으로 이행한다. 훈정시기는 縣 단위와 省 단위에 지방의회를 탄생시킨다. 각지의 현 의회가 민주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면, 상위의 省議會를 정비한다. 이렇게 해서 지방수준에서 인민의 정치의식을 訓導해 가는 것이 훈정적 민주화의 핵심이다. 중앙정부는 여전히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 혁명당 독재체제의 계속이다. 훈정적 민주화에 성공하여 전국적으로 지방자치가 확립된다면 전국적인 국민대화를 개최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상으로 여기는 헌정에 돌입하는 것이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손문의 유훈을 충실히 지키는 정치를 선택하였다. 1928년 6월 15일, 전국통일의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군정시기의 종식을 선언했다. 그리고 8월 국민당 제2기 5중전회에서 훈정단계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0월 3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훈정강령> 6조를 통과시키고 국민정부가 반포 시행하게 되었다. 이 훈정강령은 국민당 훈정지배의 국가적 기본법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회 등의 입법기관에 의해 제정된 법률에 의해 지배의 합법성을 확립한 것이 아니라, 혁명(북벌전쟁)에 의해 수립된 혁명정당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력에 의해 지배의 정통성을 선언했던 것이다. 국민당의 결정에 지나지 않는 절차에서 국민 전체가 구속되는 기본 방침이 탄생하였다.
훈정지배는 유능한 현인(국민당)이 무능한 우민(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도맡아 대행한다는 전형적인 대행주의이다. 북벌전쟁의 승리라는 혁명군사력으로 지배를 확립한 현실을 정당화하려는 논리이며 손문의 권위를 이용하려한 것이다. 그리고 국민당은 아직 전국정당으로서의 국민적 지지와 조직화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로 정권을 다투게 되는 헌정을 실현하기 전에 여타의 당을 상회하는 부동의 지위를 확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개석도 손문과 같이 인민을 阿斗(무능자)로 간주하고 그들의 주체적 정치판단을 신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훈정지배는 소련공산당 일당독재체제의 정치적 효율을 학습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賢人支配의 善政主義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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