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중국 근대사의 장개석에 대해 정리하고
국민당 정부에 대해 재조명해 본 글입니다.
많은 각주와 함께 정성들여 쓴 내용이니 참조해 보세요 ^^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장개석의 일생
2. 남경정부(南京政府)의 성립(成立)과 의의, 그리고 문제점
3. 장개석 정권의 성격과 근대화(近代化)의 노력
4. 국민당과 국민혁명
5. 국민당과 민중의 괴리
Ⅲ. 결론
본문내용
국민혁명군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북양군벌(北洋軍閥) 오패부(吳佩孚)와 손전방(孫傳芳)을 정벌하고,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 복건성을 수복한 다음, 계속하여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으로 진군해 갔다. 12월에 국민당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는 광주(廣州)에서 무한(武漢)으로 옮겨갔지만, 장개석은 남창(南昌)으로 옮기기를 주장하면서 직접 통치를 기도하였다. 1927년 3월, 국민당 2기 3중전회에서는 <당의 통치기구 통일에 대한 결의안(統一黨的領導機關決議案)> 등 당권 강화와 개인독재 방지를 위한 일련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장개석의 중앙당무 위원회 주석과 군인부 장관 등의 직위를 해임하였다. 이에 장개석은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4. 12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혁명인사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각지에서 당내의 반대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1927년 4월 18일, 장개석은 남경에서 별도로 "국민정부(國民政府)"를 세워 무한의 국민정부와 대치하였다. 같은 해 12월 1일, 송미령(宋美齡)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송자문(宋子文), 공상희(孔祥熙)와 인척관계를 맺고, 그들을 통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1928년 국민당정부 주석, 군사위원회 주석 겸 제1군 총사령관을 역임, 제1군과 풍옥상(馮玉祥)의 제2군, 염석산(閻錫山)의 제3군, 이종인(李宗仁)의 제4군을 지휘하여 봉계군벌(奉系軍閥)에 대한 작전을 개시했다. 12월에 장학량(張學良)의 동북군이 남경 국민정부 산하로 들어갔다. 1929년 장개석은 군축을 명분으로 개편회의를 소집하여 다른 파들의 군대를 감축하려 하였다. 여기에 강력한 불만을 품은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등은 장개석과의 전쟁을 불사하였다. 장개석은 제국주의와 강소 절강 지역 자산계급의 지원을 받아 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다시 왕정휘(汪精衛), 호한민(胡漢民), 손과(孫科) 등의 대항을 물리치고 자신의 통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1931년 "9. 18 사변" 이후 외세배척보다 국내안정이 우선이라는 정책을 견지하면서 중국 공농홍군과 농촌혁명근거지에 여러 차례 군사 토벌을 감행하였다
참고 자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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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마 신지․마루야마 마츠유끼 저, 박원호 역, 『중국근현대사』, 지식산업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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