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윤선도론
- 최초 등록일
- 2005.11.24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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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윤선도의 당대 평가부터 시대적 상황 작품론까지 총 정리되어있습니다.
목차
들어가며
Ⅰ. 孤山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Ⅱ. 孤山의 思想的 背景
1. 到山의 宗敎的 思想
1) 佛敎的 思想
2) 道敎的 思想
3) 儒敎的 思想
2. 孤山의 人生觀
3. 孤山의 自然觀
4. 孤山의 文學觀
5. 孤山作品의 문학사적 의의
Ⅲ. 孤山 연구
1. 孤山에 대한 평가
2. 孤山작품연구와 문학관
1) 고산 유고의 구성
2) 고산의 작품에 나타난 특징
3) 고산의 작품론
본문내용
고산은 1587년(선조 20)에 서울에서 태어나 1671년(현종 12) 85세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불우했으나 문학적으로는 뜻 깊은 한 평생을 살다 갔다. 그의 몸집은 작고 체질도 연약한 편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엄숙하고 단정한 몸가짐을 가진 꼬장꼬장한 선비로서 평생토록 《소학》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한다. 이상보 고산문학의 국문학사상 위상 연구
고산은 윤유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집에 손이 없어서 종손으로 양자를 갔다. 윤선도의 양부는 윤유기다. 지금 해남에는 해남 윤씨 종갓집과 그 유품들이 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이곳이 윤선도의 본가이다.
그가 30세 때에 이이첨의 무리들이 광해군을 업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상소문을 올려 온 나라에 경종을 올렸는데, 이 일로 하여 양부인 유기는 관찰사의 벼슬이 떨어지고 고산도 이듬해에 함경도 경원으로 귀향살이를 가게 되었다. 그가 33세 때에는 경남 기장으로 옮겨졌다가 27세 때에 인조가 즉위하자 비로소 풀려났으니 8년간이나 겨죽만 먹고 지냈기에 쌀밥을 보고서도 언뜻 무엇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뒤로 잠깐 고향인 전남 해남에 머무는 동안 몇 차례 벼슬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 6년(1628) 봄에 별시에 뽑히고, 바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이는 그의 학문이 아주 깊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이로부터 벼슬도 차츰 올라가서 큰 뜻을 펼 듯 했으나 신하들의 모함을 입어 49세에 다시금 고향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고산 하면 보길도가 연상되고, 보길도 하면 고산이 떠오를 정도로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산이 보길도와 연관을 맺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문이었다. 항간에서는 고산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다가 잘못 기착한 곳이 보길도였다고 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고산이 40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끝에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져 제주도로 향해 가다가 보길도를 보고 그 경치가 뛰어남에 끌려 부용동이라 이름 지어 영주처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병자호란 때 임금께 나아가 뵙지 않고, 또 인조의 부름에 따르지 않은 죄를 입어 평안도 영덕에 2년간의 귀양살이를 떠났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금쇄동에 별장을 짓고, <산중신곡>과 <산중속신곡> 등을 지으며 65세 때까지 자연에 흠뻑 젖어 살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