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의 신도시 화성
- 최초 등록일
- 2005.11.16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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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화성(華城)은 조선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투입되었던, 그리고 정조와 당대인들의 아름다운 꿈과 원대한 구상, 세련된 문화 수준, 당대의 시대의 변화과정의 방향성과 정치적 상황들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화성(華城)의 축성 동기
3. 새로운 도시관
4. 화성(華城) 축성 계획
5. 다산의 축성 계획안
6. 다양한 장비 이용
7. 나가는 말
- 참고문헌 -
본문내용
조선 초기, 나라의 중앙에서는 지방을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지방도시를 일정한 원칙 아래 재편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중앙에서 정한 유교적인 예의 질서에 따라서 도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도시는 가급적 하나의 주산을 두었으며 관청은 주산 아래 남향으로 배치되었고, 그 앞에는 동서 방향으로 도로를 두었다. 관청의 으뜸은 객사였다.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가 모셔졌으며 고을 수령이 이곳에서 절을 올렸다. 관청의 좌향, 즉 건문의 앉은 방향은 왕이 북쪽을 등지고 남면하는 것처럼 왕의 명령을 대신 집행하기 위해 남향을 하였다.
수원의 경우도 도시의 기본적인 구성은 조선 초기부터 형성된 골격을 그대로 유지 계승했다. 팔달산이라는 주산을 뒤에 두고 그 아래 관청을 배치했으며, 관청 앞 직각 방향으로 도로를 설치하고 향교와 사직단, 여단과 성황단을 모두 일정한 원칙 아래 배열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 신도시 수원이 종래 도시와 다른 점은 도시 전체의 좌향이 남향이 아니고 동향이라는 데 있다. 특히 관청이 동향을 하고 있음으로 해서 관청과 직각방향으로 형성되는 도로는 자연히 남북 방향으로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도시가 남향을 하고 도로가 동서 방향으로 놓인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이유 중 하나는 상업 활동이 활발한 신도시를 건설하는데 있다. 그 결과 서울과 삼남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수원을 새로 건설한 것이다. 따라서 이 도시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서울과 삼남을 연결하는 도로였다.
참고 자료
김동욱,「빛깔있는 책들 “수원성”」, 대원사, 1993
김동욱,「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돌베개, 2000
유봉학,「꿈의 문화유산, 화성」, 신구문화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