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서(hwp)가 작성된 한글 프로그램 버전보다 낮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열람할 경우 문서가 올바르게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신패치가 되어 있는 2010 이상 버전이나 한글뷰어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차
1. 서론
2. 시인소개
3. 1960년대의 김지하
4. 등단 이후와 1970년대
4.1. 「황톳길」
4.2. 「오적」
4.3. 「타는 목마름으로」
5. 1980년대의 김지하
5.1. 생명사상으로의 전환
5.2. 김지하의 생명사상
5.3. 생명사상의 시적 재현
6. 1990년대 이후
7. 결론
8.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서론
박정희와 유신체제, 아마 우리가 1970년대를 정의한다고 한다면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역사적 키워드일 것이다. 국가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과 유신 독재체제로 인해 수많은 국민이 희생되었다는 부정적 입장이 팽팽히 맞서,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논쟁은 끊이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
1969년 3선 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걸림돌을 제거한 박정희 정권은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에 치중했다. 특히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론에 대한 감시의 눈길은 삼엄해졌다. 글을 쓸 때 단어 하나의 선택도 조심스러워지고 자신의 견해조차 당당하게 피력할 수 없었던 시기에, 김지하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시 안에 담아 마음껏 펼쳤고, 당시의 현실 상황을 시 속에 투영시켰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헌신했던 시인으로 그의 시는 정치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의 결합, 민중적 정신을 민족적 양식으로 통합하여 민중적 리얼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고 일컬어진다. 또한 일제시대의 저항시의 맥을 계승하고 60년대 김수영, 신동엽의 참여시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켰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본고에서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김지하를 선정하고 그의 발자취를 돌아보고자 한다.
2. 시인소개
김지하는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1980년대 중반이후에는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사상가다. 본명은 영일이며, 지하는 필명으로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1941년 2월4일 전라남도 목포의 동학농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원주중학교 재학 중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인연을 맺은 뒤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1963년 3월 『목포문학』에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 「저녁 이야기」가 처음으로 활자화 되었고 이듬해부터 전투적인 시를 발표하게 시작하였다. 이어 1964년 6월 '서울대학교 6.3 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체포되어 4개월의 수감 끝에 풀려난 뒤, 1966년 8월 7년6개월 만에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참고 자료
고준석, 「김지하의 초기 시 세계 및 생명사상 연구」, 원광대학교, 2010.
김경화, 「김지하 초기 서정시 연구」, 목포대학교, 2004.
김인옥, 「김지하 시에 나타난 “생명”의 재현」, 『동학학보』, 동학학회, 2012.
김재현,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유토피아 의식」, 『시대와 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1.
신정하, 「김지하의 생명사상」, 전남대학교, 2003.
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나무이야기, 2009.
전병준, 「김지하 초기시에서 “수동적 적극성”의 의미」, 『우리어문연구 43집』, 우리어문학회, 2012.
하서경,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시적 재현 양상」, 경희대학교, 2011.
허문명, 『김지하와 그의 시대』, 블루엘리펀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