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관과 사초의 특징
- 최초 등록일
- 2022.11.13
- 최종 저작일
-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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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사관과 사초의 특징"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조선시대 사관과 사초의 작성
2. 사초의 작성
본문내용
1. 조선시대 사관과 사초의 작성
1) 조선시대 사관의 선발과 자격
★ 사관의 기원
: 사관의 종교성
→ 갑골문 등에서 史(손으로 붓을 잡고 있는 모양)는 제사, 卜筮, 聖曆(별자리를 보는 것) 命(왕이 신하에게 내려 명령한 책명), 기사의 작성자 등으로 등장
◆ 史와 함께 <주례>의 책을 보면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복인, 점인, 정인 이라는 표현은 같은 기능,역할을 수행함. 갑골문이라는 것이 문자가 없을 때, 전쟁을 치러야하는지 아닌지, 갑골문 쪼개진 것을 보고 결정하는 것처럼. 이렇게 나타난 형상들을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문자가 등장하기 전에 사의 존재는 상당히 종교적 기능을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사의 출발은 종교적 의미로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춘추전국시대 이후 각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자로 이해됨 : 역사의 효용성 내지 목적 인식
세상살이의 질서와 원칙이 쇠미(衰微)해지면서 거짓된 말과 몹쓸 행동이 생겨났다. 신하가 임금을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자가 걱정되어 <<춘추(春秋)>>를 지었는데, <<춘추>>가 완성되자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벌벌 떨었다(<<맹자>>)
→ 唐代 이후 史館(보통 館閣- 조선시대 홍문관,예문관,춘추관,규장각이라고 한다.)이 성립됨.
중국에서는 관각체가 있음. 역사를 편찬하는 사관이라고 될 수 있다.
: 이전까지 개인이 정사를 편찬한 것(예 사마담과 사마천- 『사기』, 또는 중국 漢書, 반표,반고까지 이어짐. 즉 기관으로 사관이 이뤄지기 전은 별도의 기관으로 있었던 것은 아님. 그렇다고 이것을 사찬이라고 하기는 그렇다. 국가에서 정식적으로 편찬한 정사와 관찬 기록이다. )과 달리 관청, 즉 사관이 성립됨
: 실록(사실을 기록한다는 의미, 이것이 고유명사로 쓰면 역대왕들의 기록들을 다음 왕들이 기록하는 편찬물이라고 사용한다)의 편찬 → 상시적으로 관원을 두어 사관을 운영하면서 가능해짐, 우리가 사용하는 실록은 양왕조에서 등장함. 지속적으로 쭉 편찬되지 않고 당대에 와서 실록들이 나오게 됨. 당대에 와서도 실록 편찬이 됐지만, 당왕조 전체의 실록은 편찬되지 않는다. 축적돼서 편찬되었을 것이다.
: 사관의 자격에 대한 문제 제기가 등장하면서, 유지기는 삼장(才, 學, 識, 재능뿐만 아니라 학식도 갖춰야한다고 함),을 조건으로 제시함.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