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동아시아 문학의 지평과 나말여초 서사문학
목차
1. 들어가며
2. 나말여초의 사회적 분위기
3. 육두품 지식인과 지식인의 불우
4. 동아시아 문학과의 교류5. 중국서적의 유입에 대한 정황 근거
6.『수이전』의 개별작품과 기존 연구
7. 「최치원」과 관련된 논의
8. 나오며
본문내용
1. 서론
우리가 흔히 나말여초라고 부르는 시기는 반드시 엄격하게 기간을 정하여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구자에 따라서 新羅下代에서부터 高麗 成宗 무렵까지를 폭넓게 다루기도 하고, 좁게는 後三國時代라고 할 수 있는 眞聖女王代에서 고려 太祖에 의한 통일의 완성까지를 기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말여초라고 통칭하는 시기는, 진성여왕 3년(889) 전국적인 지방 세력의 반란으로 신라의 통치 질서가 무너지고 지방세력가들이 독자적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로부터, 고려 태조에 의하여 후삼국의 분열이 막을 내린 후, 유교적 정치이념의 실현과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成宗 初까지 약 100년간의 기간을 가리킨다.
나말여초 시기의 문학을 연구할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하지만 이번 발표주제를 동아시아 서사문학과 나말여초 서사문학 사이의 연관성(혹은 영향관계)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에 따라 여러 곳에 흩어져 전해지는 『수이전』에 수록된 작품들과 나말여초 전기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나말여초의 사회적 분위기
신라 사회는 혈통 중심의 골품제도가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상층민은 사회적 특권을, 하층민은 사회적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인간의 운명에 낙인을 찍었던 골품은 혈통에 의해 결정되고, 혈통은 부계와 모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혼인 관계가 인간의 일생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개인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통혼권도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왕실 혈통 중심 체제가 사회 전체에 깊게 형성되었으며, 골품제도의 모순이 확대되면서 신분 갈등이 심각해졌다.
신라가 망하기 이전부터 지방 호족세력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는데, 후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뿐만 아니라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 또한 호족세력이었다. 왕건에 의해 성립된 새로운 고려사회는,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서 점차 체제가 안정되어 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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