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팔만대장경
- 최초 등록일
- 2003.11.15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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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팔만대장경에 관심이 많아서 레포트쓸겸 조사한것 입니다. 흥미롭게 잘 정리했으니 유용하게 쓰세요.
목차
팔만대장경판
팔만대장경판의 신비
대장경판 이렇게 옮겼다
팔만대장경의 역사
본문내용
조선중기의 임진왜란, 가까이는 한국동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안심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81,258장에 이르는 경판이 단 한 장의 분실도 없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게 된 데는 아슬아슬한 몇 번의 위기를 잘 넘겼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기록에서 알아보자.
★첫 번째는 조선왕조실록 세종19년(1436) 4월 28일조에는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ꡒ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을 청하니, 우리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도성밖에 멀리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ꡐ우리 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ꡑ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 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부에 논의하라.ꡓ하니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수송하는 데 어려움이 있사오니 감사로 하여금 감찰하고 수령이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ꡓ하므로, 그대로 따랐다.}는 대목이 있다.
만약 그때 세종대왕의 의견대로 서울 근교로 옮겨왔더라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동란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변기에 남아났을 리가 없다. 우리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왕이셨든 세종대왕께서는 팔만대장경판에 관한 한 잠간씩 정신이 맑지 못하였든 모양이다.
★두 번째 위기는 임진왜란 때이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해 버렸다. 성주에서 합천 해인사로 들어와 팔만대장경판을 약탈하는 데는 하루 이틀이면 충분한 가까운 거리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