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곡물의 수출입현황으로 본 우리나라의 식량 안보
- 최초 등록일
- 2020.06.27
- 최종 저작일
- 20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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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내 곡물의 수출입현황으로 본 우리나라의 식량 안보"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序論
1) 쌀의 背景 이야기
2) 大麥의 背景 이야기
3) 小麥의 背景 이야기
4) 目的
2. 本論
1) 우리나라 쌀의 需給現況
2) 우리나라 大麥의 需給現況
3) 우리나라 小麥의 需給現況
4) 곡물 需給現況으로 본 問題點
5) 내가 생각하는 解決책
3. 要約
본문내용
1. 序論
1) 쌀의 背景 이야기
우리의 主食인 벼는 그 先祖와 發祥地 모두 아직 確實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植物學적 유연關係로 볼 때 東南아시아에서 발견된 여러해살이 野生 벼의 一種으로부터 分化된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따라서 벼의 發祥地는 中國 운남성 周邊과 印度의 아삼 地域과 같이 南部 및 東南아시아의 高溫多濕한 地域인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有力하다. 中國에서는 BC 7000년경부터 벼를 처음 栽培하기 始作했고, 印度에서는 BC 5000年경부터 벼를 栽培한 것으로 推定된다. 우리나라로 流入된 벼의 傳來도 여러 가지로 推定되는데 그중 中國 원난 地域에서 양쯔江과 화이허江을 건너, 산둥半島를 지나 漢江 下流로 流入되었다는 主張이 가장 說得力이 있다.
사실 벼는 先史時代부터 利用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고 벼를 대충 갈아서 커다란 土器에 넣어 끓여내 걸쭉한 죽 形態로 먹거나 쪄서 먹었다고 한다. 이후 단단한 道具의 發明으로 벼 生産量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벼를 利用하는 方法 또한 지금과 비슷해졌다. 統一新羅부터 쌀이 主食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으나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를 누릴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쌀이 主食이 되기 전까진 粟이나 大麥, 小麥과 같은 雜穀이 주를 이루었는데, 統一新羅 때에도 여전히 一般 百姓들은 大麥, 粟을 주로 利用했었다. 高麗時代까지 쌀은 다른 穀類의 生産量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으나 朝鮮時代에 들어서고 난 뒤부터 穀類의 代表가 되었다.
이 박을 타거들랑 아무것도 나오지 말고 쌀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이로구나.
<흥보가> 中
암맹 부친 행원키로 이 몸을 팔까 하옵니다. (중략) 백미 삼백 석만 조시옵소서.
<심청가> 中
朝鮮時代가 背景인 두 이야기에서 나온 노랫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時代의 사람들은 쌀農事를 世上의 根本으로 여겼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 쌀을 가지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日帝强占기의 韓國은 食生活이 매우 窮乏했었다.
참고 자료
[www.mafra.go.kr/ 농림수산식품부]
[kosis.kr/ 국가통계포털]
[www.rda.go.kr/ 농촌진흥청]
정혜경, 『쌀의 인문학』, 도서출판따비, p.26~38,
김용수, 최재성, 석호문, 신동화. 『건강 지킴이 보리의 재발견』, 도서출판 식안연, p.47~49, p116, 그림 0 대맥 재배종의 전파 경로
EBS 지식채널 e, 쌀(2015)
장시광, 심청전
류수열, 흥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