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남한의 정치집단』
- 최초 등록일
- 2020.04.23
- 최종 저작일
-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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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45년 남한의 정치집단』"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본론
1) 충칭 임시정부의 귀국
2) 임시정부의 내분
3) 건국준비위원회의 성립과 좌경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의 선포
4) 우익 진영의 한국 민주당
5) 미군정
3.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은 한국 사회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인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를 가졌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됨으로 정치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치활동의 자유로 다양한 정치집단이 등장하였다. 그 중 임시정부와 건국준비위원회, 한국민주당, 미군정이 대표적이라 생각된다. 비록 미군정은 정치집단으로 볼 수 없지만 남한에서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부터 1945년 당시의 남한의 정치세력에 대해 알아보겠다.
2. 본론
1) 충칭 임시정부의 귀국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는 1932년 항저우(杭州), 1938년 광저우(廣州) 등을 거쳐 1940년에는 충칭(重慶)으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 운동을 전개했다. 5년 후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라디오가 방송되며 일제의 아래에 있던 한국은 드디어 해방을 맞는다. 충칭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임정의 요인들은 한국으로 귀국하려 하나 한 가지 문제에 부딪친다.
당시 한국은 온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라 미군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미군 정책의 핵심은 전쟁 중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 세력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한 정치 세력을 승인하고 지원하여 장래의 독립정부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면 그 정부는 한국인의 자주적 의사와 배치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45년 9월 6일에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임정에 대한 미군정의 태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과 같이 ‘부인’한 것이 아니라 ‘불승인’한 것이다. 인공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최소화 하고 견제 세력인 우익세력을 귀국 시키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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