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회의 활동과 무장봉기
- 최초 등록일
- 2020.03.26
- 최종 저작일
- 2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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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동맹회는 성립 이래 화남, 화중 각지에서 회당과 신군(新軍)에 작용하여 몇 차례나 거병하였다. 손문은 광동, 광서를 점령한 다음, 양자간 유역으로 진출하여 회중의 신군과 합류한다는 구상 아래, 1907년에 광동, 광서, 운남에서 여섯 번이나 무장봉기를 시도하였다. 그 실패의 경험을 총괄하여 1911년 4월 손문과 황흥의 지도하에 화교와 일본유학생을 중심으로, 광주에서 동맹회성립 이래 최대규모의 봉기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봉기도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실패하였다.
구 화흥회의 송교인 등은 손문과 동맹회의 화남 중시에 만족하지 않고 양자강 유역 각지의 동시 봉기에 의한 혁명정부의 수립과 북벌이라는 구상을 가지고 1911년 신해(辛亥)년에 상해에다 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앞서 호북의 혁명과 지식청년들은 무창(茂昌)의 신군(新軍)에 끼어들어 장병들에게 혁명사상을 보급하고 공진회(共進會) 문학(文學)사 등의 혁명단체를 신군내에 설립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중국근현대사 코지마 신지, 마루야마 마츠유끼 저, 박원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