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 최초 등록일
- 2019.05.27
- 최종 저작일
- 20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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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一. 서론
二. 본론
1. 홍경래 난의 배경
2. 홍경래의 난의 전개 과정
2-1 지도부의 결집과 봉기 준비
2-2 홍경래의 난 봉기
2-3 관군의 반격, 송림전투 패배
2-4 정주성 전투
3. 홍경래의 난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三. 결론
본문내용
一. 서론
조선의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로 불릴 정도로 농민의 사회적 역할이 컸다. 이러한 움직임은 18세기인 영ㆍ정조 시기에도 있었지만 이들이 조직화 되어 민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세기 초기부터였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의 향상에 따른 해택은 일부에게만 돌아갔고 이로인해 토지를 떠나는 농민들이 늘어났으며 농촌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농민들은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때문에 전국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그리하여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라고도 한다. 민란은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그 주체는 농민이고 민란을 흔히 농민항쟁이라 한다. 관직에 나가 당시의 사회적 제도를 바꿀 힘이 없는 농민들에게는 봉기를 일으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농민에게는 누구든지 민란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민란으로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다.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난들 중 서북지방 최대의 난이다. 홍경래의 난에 대해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다.
二. 본론
1. 홍경래 난의 배경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사회적인 모순이고 또 하나는 서북 지방의 사회 경제적 특징이다.
고려시대의 하급 관리에서 그 기원을 시작하는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조선시대에 있어서 서북 지방은 여요전쟁 등의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서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해 왔으며, 결정적으로 후기에는 몽골의 침략에 동녕부라는 이름으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계속 침략을 당하였기 때문에 고전적 양반이라는 계층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 북방 출신인 태조와 태종 시기부터도 관직등용에서 차별하는 등 무시하였고,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시행된 사민 정책이 시간이 지나 중종 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죄인의 가족을 서북 지방으로 보내 버리는 형태로 변질되면서 완전히 유배지로 낙인찍혔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36』
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