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 설명
- 최초 등록일
- 2019.04.22
- 최종 저작일
- 2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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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조선과 백자
(1) 국가, 조선
(2) 조선 백자의 생성과 전개
3. 가치절하 된 조선백자
4. 대표적 작품으로 보는 백자
(1) 상감백자
(2) 순백자
(3) 청화백자
(4) 철화백자
5. 맺음말
본문내용
1.서론
조선 미술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관학파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체계적 한국미술사연구와 기술로 인해 그 아름다움이 심하게 가치절하 된 비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략적인 식민통치체제를 가지고 조선을 억압했던 일제는 자신을 ‘의사서양’으로 여기고 오리엔탈리즘의 내적 재생산을 통하여 탈아시아를 목표로 삼았다. 이들에게 식민지 조선은 아직까지 저급한 문화를 가진 계몽의 대상이었고, 메이지 정부는 조선 고미술의 발굴과 보존을 제도화하여 조선의 미술사를 조선이 아닌 일제의 손으로 기술한다. 이 작업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과학적 식민주의의 기초 작업이었으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한국미술사 기술에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왜곡된 시각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한국미술사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 국민 스스로의 자긍심을 깎아내리는데 일조한다. 지금은 왜 조선 백자를 올바르게 보아야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우수한 백자들을 상감, 청화, 철화, 순백자 등의 문양에 따라 나누어 폄하 되었던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재확인하고 백자 양식의 변천 및 제작기술을 알아보고자 한다.
2, 조선과 백자
(1) 국가, 조선
조선 왕조는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주자 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여 개국한 나라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문화 전반에서 중국풍이 만연하였다. 그러나 반만년 동안 중국과 다른 문화를 이루고 가꾸어 온 우리의 풍토는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주자 성리학의 이념도 발전적으로 심화되어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을 창안하게 되었다. 이렇게 소중화주의, 즉 조선 중화주의는 조선사회에 팽배했고 이러한 시대 배경 하에서 조선의 고유의 문화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유교의 덕목이 생활 속에 뿌리내리며 청렴결백 사상이 조선의 기틀이 되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사물의 외양보다는 그 속에 담긴 본래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성리학의 이념을 기본으로 청렴한 삶을 추구했다.
참고 자료
김재열, 백자·분청사기, 예경, 2000.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윤용이,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학고재, 1996.
윤용이,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 돌베개, 2007.
홍선표, 「‘韓國美術史’ 인식틀의 비판과 새로운 모색」, 「미술사논단」, 제 10권 0호(2000), 한국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