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남한의 상황
- 최초 등록일
- 2018.09.07
- 최종 저작일
-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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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8.15 해방론
2. 해방공간
3. 민족주의
4. 민주주의, 인민의 시대
5. 건국준비위원회와 미군정
6. 미국의 남한 점령과 정치 세력의 동향
7.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민중항쟁
본문내용
일반적으로 1945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이 일제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제가 정식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은 9월 2일이며, 조선총독부의 총독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은 9월 9일이다. 지금도 많은 대중이 8월 15일에 해방되었다고 보는 근거는 이는 8월 15일 일본 천황의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미만 내포된 옥음방송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 천황의 방송 이후에도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치하 일제의 조선통치 또한 지속되었다.
1941년의 일소불가침조약에 의해 소련은 연합군의 대일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피해가 컸던 미군은 얄타회담(1945.2.4.~2.11)에서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다. 이에 따라 1945년 8월 9일에 소련은 공식적으로 참전한다. 일본 천황의 방송 이후에도 일본은 8월 22일까지 싸우다 항복한다.
일반 대중에게 이러한 해방은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항복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으며, 일본을 제압한 소련과 미국의 힘에 대해 불안과 공포감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일본 항복과 조선 독립과의 연결은 전쟁 승리자인 미국과 소련에 의사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으며, 조선인 민족주의자의 건국 준비 활동과정에서 일본 항복의 의미가 대중에게 설명될 만큼 조선의 독립의 의미가 불명확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조선에 대한 정책 또한 불분명한 것이어서 일본 패전의 의미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고 현실적으로도 식민지 권력이 해체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항복의미를 확정하기 위해 선전물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차츰 대중의 불안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의 해방과 정립될 정치체제가 대한제국으로의 회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했다.(광복의 의미)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