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 독후감
- 최초 등록일
- 2019.06.09
- 최종 저작일
-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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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해방 후 한국 정치의 전개와 조만식
2. 조만식이 꿈꾼 새로운 나라:건국이념
3. 해방 후 미소관계와 조만식
4. 해방 후 한국의 정치 상황과 조만식
5. 해방 후 한국사에 대한 재인식
6. 감상 및 제언
본문내용
해방 후 한국 정치에 있어서 조만식의 위치는 특별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은 남한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김구와 이승만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남한에서 활동하였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평양에서 활동하던 조만식이 유일했다. 따라서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만식의 위치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은 하나님이 “이북은 다섯 도를 조만식 단 한사람에게 맡으라.”고 하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조만식이 북한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만식이 이런 위치에 있었기에, 해방 이후 총독부는 조만식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그들은 안전하고 질서 있는 철수를 위해서는 민족지도자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총독부조차도 조만식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조만식이 활동하였던 평양은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자들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곳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으며, 기독교 장로였던 조만식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는 조만식과 기독교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렇듯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의 주도세력이 민족주의자들이었기에, 만약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이들이 자연스레 북한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북한사회의 주도세력을 일거에 바꿔놓은 것이 바로 소련군의 진주였다. 그들은 해방 이전부터 함경도 지역에 진주하였고, 해방 후 8월 26일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평양에 들어오게 된다. 그 후 이들은 조만식과 민족주의자들이 만든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인민정치위원회를 만들어 평양의 주류였던 민족주의 세력을 일개 정치집단으로 격하하고, 평양의 소수파인 공산주의자들을 평양사회의 주류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조만식은 이런 상황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건설’이라는 명분 아래 북한사회에 민주주의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