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의 생애와 친일행적
- 최초 등록일
- 2016.12.11
- 최종 저작일
-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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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박영효의 생애
2. 갑신정변의 실패
3. 제2차 갑오개혁
4. 각종 친일단체의 활동
본문내용
1. 박영효의 생애
박영효는 1861년(철종 12년) 수원에서 진사 박원양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으로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노론 척족세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1872년 4월에 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니 그의 지위는 노론 세도가 속에서도 가히 노른자위라 할 수 있다.
1872년(고종 9년) 그의 나이 13세에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 정일품 상보국승록 대부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1870년 중반 박영효는 큰형을 따라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역관 오경석, 승려 이동인, 의관 유대치 등 북학파의 사상을 이은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1879년경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과 개화당을 만들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박영효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협의하기 위한 제3차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다. 이때 박영효는 배 위에서 태극 사괘의 국기를 만들어 일본에 도착하면서부터 사용하였다. 또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며 일본 정치가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외교관을 만나 국제 정세를 살피는 한편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박영효는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발탁되었다. 그의 형식적인 임무는 임오군란 때에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일본 측에 사과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교환을 무난히 수행하며 손해배상금 50만원의 지불방법을 완화하는 것 등을 교섭하는 일이었다.
이듬해 귀국한 박영효는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으로 있으면서 박문국, 순경부, 치도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고 도로를 정비하였으며 신식 경찰 제도를 도입하는 등 개화정책을 펼치려 했으나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쳐 듯을 이루지 못하였다.
박영효는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민태호 등의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배신과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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