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의 개화사상
- 최초 등록일
- 2008.10.23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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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윤식의 개화사상에 대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김윤식의 생애
2. 개화에 대한 인식 : 온건개화파
3. 동도서기적 개화사상
4. 김윤식의 정치사상
본문내용
1. 김윤식의 생애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자는 순경(洵卿)이며, 호는 운양(雲養). 1835년에 출생한 김윤식은 박규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대원군이 하야한 다음해인 1874년에 대과에 합격하여 출사하였다. 그는 1881년 영선사로 청나라로 가서 텐진 등지의 근대문물을 보고 이홍장과 미국과의 국교수립에 대해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그러던 중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라는 밀명을 받은 김윤식은 결국 청군의 향도관으로 귀국하고, 임오군란이 진압되면서 민씨 정권의 총애를 받는다. 하지만 박영효가 갑신정변 실패로 망명 한 2년 후 그 아버지인 박정양의 장사를 지냈다는 것과 청나라로 납치된 대원군의 귀국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유배 길에 오른다.
1894년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김윤식은 외부대신으로 복귀한다. 본래는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친청적 자세를 보이던 김윤식이었지만, 이때부터는 친일적 인물로 변해간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다시 낙마,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1901년 제주도 농민 봉기의 영향으로 전라도로 옮겨져서 1907년까지 유배생활을 한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당시 농상공부대신이었던 송병준이 김윤식이 70세 이상의 고령이라는 점을 들어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권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중추원 의장으로 임명되면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으로 가서 영친왕을 방문하고 그 곳 정계와 인연을 맺는 등의 친일 행적을 보이면서도 나철의 대종교(창설 당시에는 단군교)창설을 후원하기도 한다.
참고 자료
한국철학사 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 2003
이상일. [雲養 金允植의 사상과 활동 연구]. 동국대학교 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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