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생애와 친일 / 재평가
- 최초 등록일
- 2016.05.01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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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교육과 A+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김성수의 출생과 성장
3. 일제강점기의 활동
4. 해방정국의 활동
5. 김성수의 친일행적 논란
6. 나가는 말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인촌 김성수는 일제 강점기에는 대표적 민족언론인 동아일보사와 민족기업인 경성방직, 그리고 항일 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던 중앙학교를 운영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해방정국에서는 민족진영 중심의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인촌은 1948년 제 1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독재의 길을 걷게 되자 이승만과의 깊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반독재의 길을 걸었던 민주적 정치인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어져 있다. 그러나 1940년대에 그가 보인 행적에 대하여 진보학계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어 왔고 마침내는 그의 행적이 친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학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등재로 현실화 되었고,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도 등재됨으로써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유족과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인촌관련 인사들은 이에 대해 수긍하지 않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금까지 인촌에 대해 이루어져 온 두 가지 극단적 주장을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재평가해보고자 한다.
2. 김성수의 출생과 성장
인촌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조선 말기로서 이미 정치의 문란과 함께 사회기강이 극도로 피폐해졌고 전국에 걸쳐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던 시기이다. 인촌은 지식인이자 재력가 집안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가 세 살 때 아버지 김경중의 형 김기중의 양자로 입적함에 따라 가문의 대를 잇는 대들보로서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의 삶에는 생부와 양부의 뒷받침이 크게 작용한다. 생부와 양부는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고, 이러한 가풍이 인촌의 인격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