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전기 대 거란관계
- 최초 등록일
- 2010.06.09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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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전기 거란과의 관계에 대해 정리한 자료입니다.
국편위 한국사를 참고하였습니다.
목차
1. 거란 개관
2.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 초기 고려와의 관계
1) 1차 침입
2) 2차 침입
3) 3차 침입
3. 거란과의 통교
1) 정치적 통교
2) 사신의 파견
3) 원병요청문제
4) 사회 문화적 교류
① 거란인의 고려 내 이주
② 대장경 조판사업
③ 사서와 문집
④ 부량(浮梁)의 설치
5) 경제교류
① 거란과의 공교역
② 거란과의 공사교역
③ 거란과의 사교역
④ 거란과의 밀무역
4. 나가면서...
<<참고문헌>>
본문내용
1. 거란에 대해서..
거란족은 5세기 이래 요하(遼河) 상류인 시라무렌(Siramuren)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다. 9세기 중엽부터 부족의 단결을 강화하였고 당나라 말기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07년 칸으로 추대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916년 여러 부족을 통합한 후 각 종족의 수령을 살해하고 황제에 올라 거란을 건국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칸을 선출하는 선거제도 원래 거란은 8개의 종족으로 구성, 각 종족은 3년에 1번씩 공동으로 1명의 칸(汗) 선출,
를 폐지하고 세습의 칸이 되어 줄곧 칸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요’(916~1125) 태조로 옹립되었다.
거란은 물자가 풍부한 중원(中原)으로 진출하기 위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단국(東丹國)세워 영토를 차지하였고, 야율아보기의 아들 태종은 화북의 연운(燕雲) 16주(州)를 획득하였다. 947년 국호를 요(遼)로 개칭한 다음 계속 남진정책을 실시했으나 960년 송이 건국됨으로써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 거란의 특징
☞ 대제국을 형성한 거란은 북쪽의 초원지대와 남쪽의 농경지대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이원적 호한분치제도(胡漢分治制度)를 형성하였다.
☞ 이것은 남면관(南面官)과 북면관(北面官)의 이중 관제(官制)라고 하는데, 남면관(南面官)은 당(唐)의 관제에 따라 한인(漢人)을 통치했으며 때로는 오대(五代)와 송(宋)의 관제도 수용하였다. 북면관(北面官)은 거란의 관습에 따라 여러 유목 부족과 속국(屬國)들을 통치하였다. 때문에 각지의 법률이 통일되지 않았지만, 성종(聖宗) 때에 이르러 한인(漢人)들이 많이 등용되면서 법전이 편찬되는 등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었다.
☞ 거란은 유목과 수렵을 위주로 생활했으며 병민일치(兵民一致), 군정일치(軍政一致)체제를 유지하였다. 『요사(遼史)』병위지(兵衛志) ‘15세 이상 50세 이하이면 모두 병적(兵籍)에 예속되었다’, 영위지(榮衛志) ‘유사시에는 전투하는 것이 임무이며, 한가할 때는 생업에 종사한다’ 고 함.
즉, 언제든지 민(民)이 군(軍)으로, 군이 민으로 전환되는 체제였다.
☞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많은 포로를 획득하였는데 이들을 노예로 삼아 생산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뒤에 중국과의 전쟁을 통해 영농법과 야금기술을 습득하면서 노예를 농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참고 자료
국편위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