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다카모리
- 최초 등록일
- 2009.06.10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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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그림 파일도 있으며, 지난학기 일본문화사 A0 받았습니다
목차
Ⅰ. 사이고 다카모리의 탄생과 성장
Ⅱ. 활동정 및 일화, 업적
Ⅲ. 다른 주요 인물과의 연관
Ⅴ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Ⅵ.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평가
Ⅶ. 사이고 다카모리의 이미지
*참고 자료
본문내용
Ⅰ. 사이고 다카모리의 탄생과 성장
문정(文政) 10년(1827) 12월 7일, 사이고 다카모리는 카고시마 성벽아래 카지야 마을에서 평무사 쿄쇼 조의 조장 키라베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향호 난슈[南洲], 아명(兒名) 기치노스케[吉之助]로 통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가문의 품격은 무사의 신분에서는 아래로부터 2번째의 신분인 하급 번사였다. 소년 시절, 싸움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완전히 오른쪽 팔꿈치를 굽힐 수가 없게 된 이후, 이때부터 무술을 포기해 학문에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16세 때, 서향은 번의 군방 서역조에 임명된다. 사츠마 번에서는, 무사의 가정의 자제가 어느 정도의 연령에 이르면, 가계의 도움이 되도록 작은 역할을 맡게 되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무사 인구가 많은 사츠마 번만이 가능한 관습이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오른쪽 팔꿈치의 상처 때문에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군방 서역조(즉 농정을 주관하는 관공서의 서기관 보조)라고 하는 역할에 임명되었다. 1854년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정치적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측근으로 활약하게 된다. 쇼군 후계자 옹립에서는 시마즈와 함께 요시노부를 밀었으나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쇼군이 되는 바람에 막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후원자인 시마즈마저 죽자 절망에 빠져 자살을 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구출된 후, 오시마로 유배되었다.
Ⅱ. 활동정 및 일화, 업적
▷ 아마미에서의 생활
아마미오시마에서의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활에는 수많은 일화가 있다. 당시의 아마미오시마라고 말하면 귀중한 설탕의 생산지이며 도민에게는 가장 엄격하고, 그리고 가혹한 징수를 하고 있었다. 당시 섬의 농가에는 각 호 각각의 부담 생산액을 할당하고 할당량을 달성 할 수 없을 때는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 밭에서 만든 사탕수수인데 한입마저도 그 생산 농가의 사람들에게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 해 사탕수수가 흉작이었으므로 그 할당량을 달성 할 수 없었던 농민들이 많았고 공무원들은 그 일이 자신들의 실수가 되는 것을 무서워해 그 농민들에게 엄격한 고문을 더했다.
참고 자료
구태훈 ‧ 조명철 공저, 「일본근세근현대사」, 한국방송통산대학교출판부, 2003,
사이고 다카모리홈 페이지 http://www.page.sannet.ne.jp/ytsubu/index.htm
혜안기획실편. 『제국 흥망의 연출자들』. 혜안 , 1995.
시바료타로. 『꿈꾸는 열도 정한론 - 사이고다카모리』신원문화사, 1995.
정혜선, 「한국인의 일본사」, 2008,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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