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 최초 등록일
- 2008.04.19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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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농민전쟁 -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의 발발의 전 과정을 씀.
목차
1. 황건적의 난 - 시대배경
2. 황건적의 난 - 배경 및 원인
3. 태평도와 오두미도
4. 황건적의 난 - 경과
5. 황건적의 난 - 결과
6. 황건적의 난 - 의의 및 평가
본문내용
후한 중기 이후 중앙에서는 외척과 환관의 치열한 싸움으로 정치가 문란하여 중앙정부의 무질서로 소규모 자작농민의 감소와 지방 부호의 꾸준한 증가로 인한 조세 기반의 위축을 막으려는 조치를 전혀 취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흉년 시에 구제 사업을 펴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는데 더구나 한 화제 유조(劉肇) 시기부터 전국 각지에서는 끊임없이 수해, 가뭄과 메뚜기 때의 재해가 일어나 기근이 계속되어 농민은 만성적인 기아상태에 빠져들면서 순제(順帝) 때부터 매년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발발하였다. 이들 반란은 정부군에 의해 그때마다 탄압을 받았는데 정부는 이에 대한 군비부담도 모두 농민에게 부담시켜 일반 농민들의 빈곤과 고통은 극도에 달하였다.
한편, 일반 농민들의 삶은 호족에 의한 토지겸병과 외척과 환관의 정부 하에서 과중한 부역의 부담에 시달렸다. 게다가 북방에서 이민족의 침입을 방비하는 군사조직이 허술해져 강족, 흉노, 선비 등이 자주 침략했다. 그러나 국가의 방어력과 경제적 구제능력은 이미 바닥에 이르러 있었다. ......
농촌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있을 즈음 서역지방에서 들어온 불교가 서서히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또 불교와 함께 들어온 서역의 점성술에 바탕을 둔 미신이 유행하여 중국 전래의 민간신앙과 결합하고, 다시 불교교단의 조직을 모방하여 불로장생의 종교적 결사를 만들게 되었다. 이들 교단은 敎義면에서는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고난에 시달리는 하층 농민을 끌어들이는 힘은 강하였다. 특히 단원간의 상부상조정신은 불행한 처지에 있던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충분하였다.
그리고 도교신앙은 2세기부터 도교 신도들 사이에 노자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예언자로서 신도들에게 모습을 보인 신이라는 믿음이 시작되었다. 166년 황제는 개인적으로 사당을 방문하여 노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도교 혹은 노자 숭배는 후손이 조상을 숭배하도록 부모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유교사상의 대안으로 등장하였는데 대다수 농민반란의 지도자들은 노자를 만나 새로운 유토피아 시대의 도래를 예시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기에 앞서 일반 농민 사이에는 태평도와 오두미교가 유행했는데 그 교리는 황제와 노자를 신격화환 황로신앙으로 황로의 도를 신봉하면 불로, 불사, 장생과 부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 어지러웠던 사회 속에서 현실적 욕구불만과 육체적 질병과 고통은 당시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치, 경제상의 여러 조건과 결부되어 정치적 혁명운동으로 비약하였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하북성 거록인 장각이었다.
참고 자료
『중국 민중 반란사』다니가와 미치오․모리 마사오, 송정수 역, 혜안, 1996.
『열린제국:중국 고대-1600』발레리 한센, 신성곤 역, 까치, 2005.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신성곤․윤혜영, 서해문집, 2004.
『동양사 개론』신채식, 삼영사, 2002.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캐임브리지 중국사』, 페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이동진․윤미경 역,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