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복원사업 전과 후, 복원사업의 영향
- 최초 등록일
- 2008.01.12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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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계천이 지리적으로 미치는 영향과
복개 전과 복개후의 과정에 따라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분석
목차
1.청계천의 지형적 특징
2.청게천의 복개 전 모습
-조선시대의 청계천
역사적 특징
문화적 특징
사회적 특징
- 광복 이후의 청계천
역사적 특징
문화적 특징
사회적 특징
3. 청게천의 복원사업
-복원의 필요성
-복원의 에상 효과
-복원의 과정
예산
진행 절차
4. 청게천의 복개 후 모습
역사적 으로 미치는 영향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
지리적으로 미치는 영향
5. 다른 나라와의 비교
6. 앞으로 개선해야할 과제
본문내용
◆청계천의 지형적 특징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연장 10.92km의 도시 하천이다. 청계천 유역은 총 면적 50.96㎢로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1394년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도성 안을 지리적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 조선시대의 청계천
청계천 탄생/
조선초 도성건립과 배수물길을 위해 개천에 대한 정비작업을 진행했다. 태종 때 자연천정비를 하면서 둑을 쌓아 하천의 모습을 만들고, 이후 세종 때 지천과 세천에 대한 추가정비를 했으며, 청계천을 처음으로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
<자연적 이유>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사회적 이유>
조선 초기 도성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큰 사업이었다. 개천에 대한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는 등 몇 차례에 걸친 정비로 하천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다음 해인 1412년(태종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모두 52,800명의 인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하였다.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참고 자료
서울특별시 청계천홈페이지
(노무라할아버지의)청계천 이야기/ 노무라 모토유키/예맥출판사
청계천 복원사업 백서/서울 특별시 홍보기획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