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를 통해 본 일본의 근대화
- 최초 등록일
- 2006.12.14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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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카모토를 통한 일본의 근대화
목차
Ⅰ. 사카모토료마의 일생
Ⅱ. 사카모토료마의 시대상
본문내용
Ⅰ. 사카모토료마의 일생
하급 무사인 고오시(토착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나 소년기는 누이에 의해 양육되었다. 12세 때 이해 쿠스야마 쇼스케 도장에서 공부를 시작하나 도장 친구와의 싸움이 원인이 되어 도장을 나온다. 14세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예에 심취하여 1853년 에도에 가서 당대 일류 검객인 치바 데이키치의 도장에 입문하여 5년간 검술을 배웠다.
페리의 내항으로 인해 에도가 소란할 때 느낀 바가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 1861년에는 다케치의 토사근황당에 참가하였다.
1864년 사츠마에 가서 기도 다카요시와도 친교를 맺고 사츠마와 쵸오슈우의 사이를 좋게 하려는 가교역할에 노력했다. 마침내 1866년 삿. 쵸오동맹을 성공시킴으로서 막부에 무력으로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신정부 실현에 분주하게 노력하고 있던 중, 1866년 11월 15일, 쿄토에서 고향친구인 지사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막부의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Ⅱ. 사카모토료마의 시대상
1. 막부
중세 일본의 가마쿠라[鎌倉]~에도[江戶]시대 무가(武家)정치의 시행정청(施行政廳) 및 무가정권. 본문 중국에서 출정(出征) 중에 있는 장군의 본영(本營)을 가리킨 데서 유래하였다.
2. 메이지 시대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신 정부 정치방침인 5개조 선언문을 발표, 연호를 메이지로 정하고 1867년 쿄오토에서 토오쿄오로 천도하였다. 에도 막부 멸망 이후에도 1년 6개월 가량 무사들의 반란이 계속되었으나 신정부군이 모두 진압하고 메이지 신정부는 일본 통일에 성공하였다. 신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위해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다이묘들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복속시키고 세금을 정부에서 받았으며, 모든 지방관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