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문학]한중록
- 최초 등록일
- 2005.12.15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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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중록 기일의 한부분을 정리한 것입니다.
목차
줄거리
주요인물
관련된 문화와 사건
맺음말
본문내용
◉ 들어가는 말
<<한중록>> 은 한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4번에 걸쳐 씌어진 글들의 모음이다.
其一 은 작가가 환갑이 되던 해에 친정 조카 홍수영의 청에 따라 지은 것이다. ‘본집에 귀인의 필적이 없으니 친히 무슨 글을 써 주시면 이후에도 계속 집안의 보물이 될 것입니다’ 라는 정이 있어 미루어 오다가 ‘내 회갑을 맞으니 임오년에 돌아가신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아픔이 더 크고, 또 세월이 지나면 내 정신이 더 쇠약해질 것 같아’ 써 주었다고 한다.
1. 줄거리 요약
혜경궁 홍씨의 오빠(홍낙인)는 부모님께서 일찍 얻은 자식으로 의지와 기개가 높아 15세를 지나자 큰 선비와 같은 기상을 보였다. 을축년(1745, 영조21)에 오빠는 결혼하였다. 오빠는 을해년(1775)4월 수영이를 낳았다. 을해년(1755)8월 혜경궁 홍씨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혜경궁 홍씨는 병자년(1756)9월에 청선을 낳았다. 산 후 허약하기가 심하여 아버지가 많이 근심하셨다. 그 달 아버지께서 평안 감사 관찰사의 별칭. 조선시대에 13도에 1명씩 두었으며, 대개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의 무관직을 겸하고 있었다. 관찰사의 관아를 감영(監營)이라고 한다.
를 받아 떠나시게 되었다.
그해 음력 11월에 사도세자에게 천연두 증세가 보였으나 다행히 잘 치루고 그 후 100일이 못 되어 정성왕후가 승하하였다. 한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이 영조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발생하여 삭직 삭탈관직의 준말로, 죄를 지은 사람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 명부에서 지우는 것.
되었으나 그 후 다시 복직되는 일이 생겼고 전과 같이 며느리를 사랑해주었다. 정성왕후 승하 이후 다음 달에는 인원왕후 마저 승하하였다.
양성모의 삼년상이 끝나고 영조가 정순왕후와 가례를 하였고 신사년에는 정조가 경희궁에서 관례를 하였다. 또 신사년 3월에는 아버지 홍봉한이 정승이 되었고 오빠인 홍낙인은 소과를 치루고 강서원 조선시대에 세자나 세손의 공부를 맡아보던 관아.
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영조 37년 겨울에 세손빈 간택이 있었다. 김시묵의 딸의 단자를 보고 경모궁이 마음이 기울어 순조롭게 완정되었다. 정조의 비가 재간을 지내고 즉시 마마를 곧이어 주상도 마마에 걸렸지만 곧 병이 나아서 섣달에 삼간을 지내고 영조 38년 이월 초이튿날 가례를 순성하였다.
참고 자료
전규태. (혜경궁 홍씨), 한중록, 범우사, 1988
혜경궁 홍씨, 한중록, 진화사 1985.
구인황. (혜경궁 홍씨), 한중록, 신원문화사, 2002.
정은임. (혜경궁 홍씨), 한중록, 이회문화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