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이해]제주도 4.3사건
- 최초 등록일
- 2005.04.10
- 최종 저작일
- 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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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3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한 자신의 느낌위주의 레포트입니다...
많은 참고가 되었음합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어렴풋한 기억에 제주도에는 남자가 매우 귀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짧은 생각에 제주도는 섬이기 때문에 남자들은 대부분 뱃사람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크고 작은 사고 따위로 인해 일찍 죽었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에야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잦은 핏박과 압박으로 고통받던 곳이었음에 이를 다시 해석할 수 있었다. 또한 제주도 4·3사건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알며 믿고 왔던 역사가 우리에게 꼭 진실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역적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제주도민들은 거센 바람과 파도의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삶, 농사를 짓기에는 척박한 땅에서의 삶, 반도로부터 떨어진 단절된 삶 그 속에서 매우 독립적이고 자치적이면서도 억센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 제국주의 하의 대한민국의 어느 구석도 자유롭지 못했겠지만 고려시대부터 착취의 대상이 되어버린 제주도는 이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렇게 억눌린 채 맞은 조국의 광복은 이들에게는 누구보다 방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억압보다도 악랄하였던 미군정의 수탈과 착취는 해외교포의 대거 귀환으로 인구 급증, 실업발생 등의 문제보다도 제주도민을 괴롭혔다. 따라서 그들은 자치 정부 구성과 자주교육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미군이 진주하기 전 투표를 통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좌우 동등한 위치에서 연합적인 성격을 띠었을 뿐아니라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고 도민의 생존권과 치안 확보를 위한 일제 잔류군과의 투쟁 등을 통해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 자료
mbc 이제는 말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