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최익현
- 최초 등록일
- 2004.07.06
- 최종 저작일
- 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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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
2. 시대적 상황
3. 위정척사사상
1) 위정척사사상의 등장
2)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4. 면암 최익현의 척사위정사상
1) 면암 사상의 형성
2) 실천적 사상의 성숙
3) 배타적 자주의식의 태동
4) 반개화(反開化) 내수자강(內修自强)의 자주의식
5) 항일 구국 의병 운동 (抗日 救國 義兵 運動)
5. 결론
본문내용
(3) 배타적 자주의식의 태동
대원군의 10년 집정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이 들어서게 된 후 일본은 한반도로의 세력 팽창을 기도하여 마침내 1876년 강압적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맺게 된다. 당시 조선에 있어서 개항은 곧 서국화 된다는 충격, 즉 이질문화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가적 위기로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그 대상이 역사적으로 열등 위치에 있던 일본이라는 사실은 내부적 반발을 심화시켰다. 이 반발은 당대의 위정척사론자의 선봉이었던 면암에게 더욱 강력하게 표현되는데 당시 유배에서 풀려난 면암은 죽음을 각오하고 조약의 반대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에는 조약의 부당성을 5개항목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그 첫째는 국력을 바탕에 두지 않은 채 일본의 무력적 위협에 부득이 강화한다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앞으로 양국관계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강화이후의 경제적 교역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을 들고 있고 셋째는 왜양일체론에 근거한 서구문화의 유입에 대한 경고이다. 그리고 넷째로 그는 일본인이 조선에 왕래하고 거주함으로써 생길수 있는 문제를 지적하였고 끝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을 가지고 병자년의 강화 뒤에 오늘에 이르도록 안정을 보존하였는데, 오늘날 일본과의 화해도 그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라는 일부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위의 ‘오불가지론(五不可之論)’을 통하여 그의 척사사상이 보다 구체화되고 그의 초기의 무조건적인 보수적, 배타적 입장을 넘어 새로운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주의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