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상] 동방정교회
- 최초 등록일
- 2003.11.17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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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 정교회
정교회 예배
동방정교회 역사
구원론
성직 구조 (보제 → 사제 → 주교)
종교 분포도
본문내용
한반도와 정교회의 인연
기록에 의하면 정교회와 우리 민족과의 만남은 약 8백년 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 군이 러시아를 지배하고 유럽을 유린하던 중세시대에 몽골에 파견되었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보면, 몽골의 왕실은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大公)을 후히 대접했으며 그 때 고려의 왕자들과도 접촉케 했으니 당시 볼모로 잡혀가 있던 고려 왕실 왕전(王佺) 등의 귀족 자제와도 화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관계로 보면 러시아 정교회와의 만남은 2백 60년전 조선 영조시대로 소급된다. 청나라 북경 사신 길에 올랐던 이윤신의 문견사건(聞見事件)에는 '큰 코 오랑캐'라는 의미의 대비달자(大鼻獺子)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곧 코 큰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는 이미 러시아와 청나라가 국교를 맺고 있었던 때다. 따라서 우리도 그들과 교분을 이루며 공어포와 인삼을 선물하였고 그들은 우리 사신들에게 거울과 주화를 주었다고 한다. 거울의 옛 우리말 이름은 '어르쇠'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그 무렵 아라사(러시아를 지칭하던 옛 우리말) 정교회 선교사로부터 입수한 물건들의 이름을 확실히 몰라 그냥 아라사라 불렀던 것이 후에 아르쇠로, 다시 어르쇠로 변음되어 생겨난 이름이라고 전한다.
한국정교회의 시작
19세기 말엽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치열하던 때 조선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군인들을 포함하여 120여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30여명의 러시아 국적 소지 한국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주일과 축일이면 러시아 공사 관저에 함께 모여 그들끼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했으나 성사를 축으로 한 신앙 생활이 일상 생활이었던 그들에게는 그때까지 그들을 위해 성사를 집전해 줄 정교회 사제가 조선에는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불랴노프스키는 위와 같은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의 긴급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마침내 1897년 1월 3일 본국에 사제 파송을 요청하였고, 불랴노프스키 공사의 사제 파송 요청을 받은 러시아 정교회 공의회는 1897년 7월 공의회 결정 2195호로 소규모 선교단을 조선에 파견키로 의결하고 신학 박사였던 암브로시오스 구드꼬 수사 대신부와 니콜라이 알렉시예프 보제와 봉독자 A. 니콜라신을 정교회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그들은 성당에 안치할 물건들과 성사에 사용되는 성물(聖物)들을 확보한 후 1898년 초에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는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성당이 없었다. 그리하여 독실한 신자였던 당시 러시아 공사는 자신의 관저 중에서 가장 큰 방 하나를 임시 예배 장소로 제공하였고 그 방은 약 6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임시 소성당으로 꾸며져 1900년 2월 17일 성수로 축성된 후 그 장소에서 이 땅에서의 첫 성찬예배가 거행되었다. 이날 성찬예배에는 정교 신자들 외에도 한국 정부의 대<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