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매월당 김시습의 삶과 문학
- 최초 등록일
- 2003.09.20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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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김시습의 생애
2. 생애에 대한 고찰
3. 김시습의 작품세계
4.『금오신화』의 소설적 특징
5. 김시습의 글쓰기 방법
6. 신문기사에서
본문내용
1. 김시습의 생애
세종 17년 서울 교외에서 충순위의 벼슬을 하던 가난한 문인 김일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신동으로 불릴 만큼 뛰어났다. 태어난 지 8달만에 글자를 깨우쳐 집현전 학자 최치운이 이름을 ‘시습’ 이라 지어주었다. 세 살이 되자 한문책을 줄줄 읽고 한시를 지었다. 당시의 재상 허조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찾아가 한시를 듣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후에 세종도 시습을 궁중으로 들여 그 재능을 시험하고는 매우 감동하였다. 그러던 중 15세가 되던 해 모친을 여의고 19세가 되어 결혼을 하여 집에서 나와 중흥사로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김시습의 생애 2
그가 21세가 되던 해,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자 책과 지필묵 등을 모두 태우고 손수 머리털을 자르고 절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방랑생활을 계속 하였다. 그 후로 1456년부터 전국을 돌며 글을 쓰고 백성들의 실생활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 당시 통치계급의 부패를 보게 되었다. 1464년 30세가 되어서 금오산으로 주 거처를 옮기고 이듬해 서울로 돌아갔으나, 곧 권력에 저항하여 살 것을 결심하고 금오산의 사당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금오신화> 와 <유금오록>을 집필하였다. 그 후 1471년 서울로 올라왔으나 이듬해인 1472년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서 시 쓰기를 계속한다.
김시습의 생애 3
그리고 44세가 되던 1478년, 그는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또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유교의 법도를 따라 제사를 지냈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런 부인의 죽음을 맞자 다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방랑 길에 오르는데 그의 나이 49세였다. 명승지를 찾아다니던 중 건강의 한계를 느끼고 무량사에 거처를 마련하고 1493년 2월 58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세속적인 과정으로 보면 그의 일생은 불우했을지 모르지만 15세기를 대표하는 그는 우리 문학사에 <금오신화>라는 한문소설을 창작한 동시에 유교의 이기철학과 불교의 화엄사상, 그리고 선도의 내단 사상을 한 몸에 고루 갖춘 사상가였다.
2.생애에 대한 고찰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 ·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즉,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올곧게 하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조동종(漕洞宗)의 인식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종지(宗旨)는 사랑(자비)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한다. 즉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극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참고 자료
최귀묵, 『김시습의 사상과 글 쓰기』, 소명출판, 2001
단국대학교 대학원, 『金時習文學의 道赸思想 硏究』
이재광, 『이 땅에 문화를 일군 사람들』, 세상의창
『매월당 김시습작품집』, 해누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