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와 언어 - 한국 속의 프랑스 리포트
- 최초 등록일
- 2014.11.10
- 최종 저작일
- 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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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한국 속의 프랑스 역사
1. 외교관계 수립 125년
2. 외규장각 도서 환수 문제
Ⅱ. 한국 속의 프랑스 문화
1. 명품
2. 프랑스어
Ⅲ. 이외에 한국 속의 프랑스
1. 한국 속의 작은 프랑스 마을, 쁘띠 프랑스
2. 일상 생활에서 찾는 프랑스 예술가들의 작품
참고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Ⅰ. 한국 속의 프랑스 역사
서유럽 국가 중 한국과 가장 먼저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나라는 사실상 프랑스이다. 그러나 1886년까지 한불관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이전의 양국 간 접촉은 실제로 몇몇 선원들과 선교사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최초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인 피에르 모방 (Pierre Maubant)이 압록강을 건너서 한국에 도착한 것이 1836년(헌종 1)이었다. 1837년에는 조선 주교로 임명된 앵베르(Imbert)와 신부(가톨릭이나 성공회 등에서의 성직자) 샤스탱이 잠입,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탄생시키는 등 포교활동에 진력하였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초기 프랑스 선교사들은 "은둔의 나라 "한국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 당시 외국인들에 대한 금기에 용감히 맞섰지만 결국 사학(조선시대에 양명학·동학·가톨릭교)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하는 운명에 처했다(1839년(기해박해), 1846년(병오박해)과 1866년(병인박해)에 박해가 자행되었다).이때 프랑스를 끌러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흥선 대원군도 여론에 따라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천주교를 탄압했다. 1866 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대원군의 명에 의해 처형당하자 프랑스군은 보복조치를 취하게 된다.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7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을 공격하였다. 강화읍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위협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조선 정부는 이에 맞서 군대를 재편성하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한성근과 양헌수 부대는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각각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는 정족산성 전투패배와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강화도에서 철수하였다. 이 때 프랑스 군인들은 상당량의 금은과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의궤 297 책을 약탈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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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프랑스, http://www.pfcamp.com/.
텐바이텐, http://www.10x10.co.kr/. (그림 10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