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
- 최초 등록일
- 2012.10.13
- 최종 저작일
- 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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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시대 노예해방전쟁을 하였던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소논문 입니다.
목차
1. 역사적 배경
(1)로마제국의 발전
(2)검투사에 대한 이해
2.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자유로 인도하리라!”
3. 자유의 투사 스파르타쿠스
본문내용
로마와 포에니 전쟁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중엽 이탈리아 인의 일파인 라틴인이 티베르 강변에 세운 도시 국가였다. 왕정으로 시작되었고 한때 에트루리아왕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 왕의 압박이 커지자 그를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들이 정권을 쥐고 집정관이나 원로들이 요직을 독점 했다. 그러나 평민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그들도 정치 참여를 요구 하였고 마침내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할 수 있는 호민관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이후로 12표법, 리키니우스법, 호르텐시우스 법이 제정되어 점차 평민은 귀족과 법률상 동등해졌다. 민권이 신장되면서 나라의 힘도 강해진 로마는 기원전 270년경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한편 당시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지중해 연안에는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식민 도시가 많았고 그 중 카르타고의 세력이 가장 컸다. 그런데 시칠리아 섬의 메사나에서 이 카르타고의 무역 독점권을 견제하려고 로마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로마는 지중해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중 략>
3. 자유의 투사 스파르타쿠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자유로 인도하리라!”
스파르타쿠스 노예전쟁은 18세기 이후에 와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단순히 노예들의 상징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종류의 학정에 맞서는 자유의 우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를 역사 속에서 유일했던 정당한 전쟁의 지도자로 보았고, 공산주의 사상의 시조인 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고대 시대가 낳은 최상의 동지라고 말하였다. 그는 친구인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탈리아 자유의 전사 주세페 가리발디를 그에게 비교하였다. 칼 마르크스가 스파르타쿠스를 프롤레타리아의 영웅으로 선택했을 때, 좌파 이데올로기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만약에 모든 역사가 계급투쟁이라면,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야 말로 그 사관에 꼭 들어맞지 않을까? 그는 ‘잃을 것이라곤 쇠사슬 밖에 없는’, ‘짓밟히기만 해온 가망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구성원이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비롯하여 로마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부르주아였다.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생산 수단을 가지고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던 존재들이었다.
참고 자료
-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 스파르타쿠스의 죽음(막스 갈로)
- 신화가 된 노예 스파르타쿠스(M J 트로우)
- 영화 <스파르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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