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 전쟁
- 최초 등록일
- 2013.02.16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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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스파르타쿠스 전쟁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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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진승과 오광의 외침아래 진나라의 위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이 분서갱유 정책과 함께 땅속으로파묻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질서를 뒤엎는 언행이었다. 비록 두 사람의 봉기가 결국에는 권력다툼과 함께 사라졌지만 동양에서 그 들의 투쟁은 상당히 의미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도 그 사건을 빠짐없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중국이 있다면, 서양에서는 로마를 들 수 있다. 로마 역시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고, 그 속에는 신분제가 있었다. 평민과 귀족의 차이가 동양과 같이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노예는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그 비참함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스파르타쿠스는 일어났다. “우리가 왜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 가?”라는 분노에 찬 사자후로 74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카푸아를 탈출했다. 어제까지 한 밥상에서 밥을 먹던 동지를 생판 모르던 남을 위해 찔러야 한다. 만약 잔인하게 죽이지 못하면 도리어 매질을 당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빼앗기는 짐승만도 못한 삶에서 그들은 자유를 갈구했다.
<중 략>
<스파르타쿠스 전쟁>이야기를 읽으면서 스파르타쿠스의 정당성에 대해서 혼란스러웠다. 억압에서 풀려나기를 갈구했지만 막상 풀려나자 자신들과 같은 입장인 사람들을 핍박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부자들에게서도 약탈했겠지만 상식적으로 부자들은 그만한 안전장치들이 있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약탈하기가 수월한 평민들이나 그들과 같은 처지인 노예집단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파르타쿠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보지만 나는 폭력이 폭력을 낳은 프랑스-나치당의 사례가 떠오르기만 하다. 하지만 분명히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당대의 중국뿐만 아니라 후세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만적 사례만 보더라도 하층민들에게 큰 반향을 가져왔듯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서양사에서 하층민이 상층민에게 대항한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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