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의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12.05.08
- 최종 저작일
- 2011.05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서재필의 일생, 그리고 그의 업적에 대한 재조명입니다.
A+ 받았던 레포트 입니다.
유용하게 사용하세요
목차
서재필의 출생과 성장기
미국 망명생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이차 망명, 그리고 한인단체 활동과 독립운동
해방과 죽음
서재필에 대한 평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진정한 독립을 추구한 것일까
-서재필은 민족주의자였는가?
-우리는 그렇다면 서재필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본문내용
?서재필의 출생과 성장기
서재필은 1864년 1월 4일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진사 달성 서씨 서광효와 부인 성주 이씨의 5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내지게 되어,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갔다.
서재필은 18세 되던 1882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서재필이 처음 받은 직책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였다.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서재필은 먼 친척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과 조우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3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숙에 입학하였는데, 서재필은 일본어를 배우고 어학의 재능이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 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후에,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수료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조련국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으나, 이 계획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민씨 일족과 1884년말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