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문학] 청대문학
- 최초 등록일
- 2002.11.18
- 최종 저작일
-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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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적 배경
2. 시
3. 산문
4. 사
5. 희곡
6. 소설
7. 기타 - 탄사(탄사)와 고사(고사)
본문내용
청나라는 이민족인 만주족의 왕조였으나 몽고족의 원나라 때와는 달리 문학이 발전해왔다. 그것은 청조가 몽고족처럼 무력으로 한족들을 가혹하게 압박하거나 하지 않고 무력을 쓰면서도 부드러운 문화정책으로 한족을 달랬기 때문이다. 만주족들은 한족의 문화를 인정하고 한족들의 사회 관습과 종교 의식 같은 것을 되도록 그대로 보존하게 하였으며, 만주족의 황족이나 귀족들은 자진하여 어릴 때부터 한문화에 대한 교육을 받아 한족과 같은 윤리관을 지니고 한족과 같은 시문을 짓게 까지 되었다. 만주족은 무력으로는 한족을 지배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한족에 동화되는 경향을 보여 이민족의 지배에 비분을 터트리던 한족 지식인들의 분위기도 그다지 격앙되지 않아 뒤에는 거의 청조에 대한 원한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현상은 청나라 초기의 황제 강희제(康熙帝 1662∼1722)와 건륭제(乾隆帝 1736∼1795) 같은 명군이 나타나 적극적인 학술 부흥책을 쓴데 크게 힘입은 결과라 볼 수 있다. 강희제 때에는 한족의 원로들을 동원하여 대문화 사업을 버렸으니 『명사(明史)』의 편찬을 비롯하여 『패문운부(佩文韻府)』, 『강희자전(康熙字典)』등의 편찬이 그것이다. 건륭제 때에는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어마어마한 전집이 편찬된 것을 비롯하여 『대청회전(大淸會典)』, 『대청일통지(大淸一統知)』등이 편찬되었다. 그 사이에도 여러 번의 옥사를 치르기도 했지만 많은 한족의 지식인들이 성군의 후한 대우를 고맙게 여기면서 청조의 정책에 순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침 청나라 조정에서 한족의 지식인들을 이러한 문화 사업에 동원함으로써 그들을 달래어 항거 세력을 미연에 방지하고 나라는 망했더라도 문화 유산은 잘 연구하고 보존시켜야 한다는 한족 지식인들의 욕구가 합치해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로써 청대에는 고증학을 비롯하여 고전 학문의 연구가 성행한다. 청대 초기에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같은 학자들이 경세치용의 실용적인 학문을 주장하며 나선 것은 명대의 이학에 대한 반발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고전에 대한 연구가 다른 어떤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이러한 복고적인 경향은 시나 산문, 사, 희곡, 소설을 막론하고 이전의 중국문학의 정식으로 등장했던 모든 분야의 문학이 다시 드러내어져 검토되고 의작되었다. 산문에서는 고문뿐만이 아니라 변문까지 다시 지어졌고 곡에 있어서는 잡극은 물론 산곡, 전기, 곤곡 등 여러 체재의 것들이 지어졌다. 이로 볼 때 청대의 문학은 새로운 창의력이나 생명력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고전 문학의 정리나 연구적인 면에서는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송대, 명대에 발생하였던 백화소설이 청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문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창작면에서도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