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한국 중세사, 고려] 고려 왕조의 성립
- 최초 등록일
- 2002.10.28
- 최종 저작일
- 2002.10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사학과 발표수업자료임
목차
1. 머리말
2. 신라말의 사회정세와 후삼국의 성립
1) 사회 혼란과 호족의 대두
2) 후삼국의 성립
3. 고려 왕조의 성립
1) 왕건 세계의 성장
2) 고려 왕조의 탄생과 후삼국의 통일
4. 고려 왕조 성립의 역사적 의의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9세기 말과 10세기 초, 신라(新羅) 사회는 집권세력의 타락과 골품제도(骨品制度)의 모순 등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급격하게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중앙 권력의 약화를 틈타 지방에서는 이른바 호족(豪族)세력이 성장하게 되고 한반도는 다시 한번 심각한 분열과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전란의 시대 속에서 건국되어 그 혼란을 평정하고 새로운 통일의 시대를 연 국가가 바로 고려(高麗)이다. 고려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한반도의 재통일(再統一)이라는 위업을 이루어 낸 왕조이며 불교(佛敎)를 숭상하면서도 유교적(儒敎的) 정치 이념을 채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즉 중세적(中世的) 사회로 이행한 왕조이기도 하다. 즉 고려 왕조의 성립은 단순한 새 왕조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커다란 사회적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본 발표에서는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고려 왕조가 극심한 분열과 전란의 시기를 어떻게 이겨내고 통일 왕조로서 이 땅에 설 수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지적이 있기를 바란다.
2. 신라말(新羅末)의 사회 정세와 후삼국의 정립
1) 사회 혼란과 호족의 대두
신라 사회는 8세기 후반부터 극심한 왕위 쟁탈전을 거치며 진골 귀족(眞骨貴族)들이 내부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모순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신라 사회를 이끌어 오던 골품제(骨品制)는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해 갔고, 현실적으로도 전제 왕권은 그 권능(權能)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편 중앙 귀족들은 부패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고 이에 따라 정치 질서는 해이해지고, 국가 재정은 궁핍해져만 갔다. 신라 하대(下代)로 접어들면서 중앙 정계의 혼란과 더불어 귀족들의 토지 소유는 급격히 증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전장(田莊)이라 불리우는 대토지 소유가 형성되었다.
참고 자료
김갑동, 『나말여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 『김갑동 교수의 태조 왕건』, 일빛, 200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2, 1993
박한설, 「왕건세계의 무역활동에 대하여 - 그들의 출신구명을 중심으로」,『史叢』10, 1965.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996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 연구』, 일조각, 1993.
홍승기 외, 『고려 태조의 국가 경영』,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