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기
- 최초 등록일
- 2011.01.31
- 최종 저작일
- 1997.01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000원
소개글
문화대혁명기의 국내외 정세
목차
제1절 진보도(珍寶島) 사건과 당9전대회
제2절 임표의 반란 미수 사건
제3절 핵무기․인공위성의 개발과 대서방 외교정책의 대전환
제4절 사인방(四人幇)과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
제5절 모택동시대의 종언
이 시기 문학개관 및 결론
본문내용
문화대혁명기의 국내외 정세
제1절 진보도(珍寶島) 사건과 당9전대회
진보도 사건- 1969년 4월 1일 중소 국경인 흑룡강성의 진보도(러시아명 다만스키섬)에서 일어난 양국 국경경비대의 무력 충돌사건. 1950년대 말 이후 중소 대립이 가장 첨예화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중국 국경경비대가 진보도가 중국령이라 주장하고 거기에 주둔한 소련 국경경비대를 기습, 31명을 살해하고 이를 점령하였으나, 소련의 계획적인 대규모 반격을 받고 패배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소련은 극동 및 몽골의 주둔 병력을 증가하고 군관구를 신설하여 대중공전비(對中共戰備)를 강화하였고 중국 또한 국경군구(國境軍區)의 병력을 증가하였다.
당9전대회- 결과적으로 임표는 모택동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
제2절 임표의 반란 미수 사건
반(反)모택동 쿠데타를 음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탈출하여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지방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3절 핵무기인공위성의 개발과 대서방 외교정책의 대전환
소련은 1957년 10월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면서 세계최신과학무기 개발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는 강력한 군사무기를 바탕으로 세계 평화안을 제시했다. 모택동이 소련의 이러한 정책 전환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1960년 들어서면서 마침내 양국의 우호관계는 결렬되었다. 이 때부터 모택동은 핵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며 과학무기 개발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모택동은 세계 군사대국의 하나로 부상하자 공산권보다는 더 넓은 서방세계의 국제무대를 선택했다. 흐루시초프가 제기한 평화 이행안을 수정주의라고 통렬히 비난하던 모택동이 소련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중국은 1971년 4월에 일본 나고야에서 있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미국대표선수들을 북경으로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가져, 이른바 핑퐁외교라는 새로운 국제외교 용어를 만들어 내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어 7월 15일에 워싱턴과 북경에서 동시에 닉슨의 북경방문을 발표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