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전의 독립운동세력
- 최초 등록일
- 2010.05.23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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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직전의 독립운동세력 중 임시정부, 독립동맹, 건국동맹에 대해 쓴 리포트이고 교수님께 깔끔하게 잘 썼다고 칭찬받았습니다.
목차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2. 화북 조선독립동맹
3. 국내 조선건국동맹
4. 독립운동세력들의 통일운동
Ⅲ. 결론
* 참고 문헌
본문내용
1930년대에 임시정부는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김구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에 주력해 이봉창, 윤봉길의 활동으로 임시정부의 위치가 다소 제고된 형편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보복 검색이 강화되고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 된 후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항저우(1932년), 전장(1935년), 장사(1937년), 광저우(1938년), 류저우(1938년), 치장(1939년)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1940년에 중경(충칭)에 안착하였다.
임시정부의 조직이 다시 활기를 찾는 것은 바로 1940년 중경에 정착한 이후의 일이었다. 1932년 상해를 떠난 이래 임시정부는 중국대륙 각지로 소재지를 옮겨 다니는데 이는 피난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중경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일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먼저 지도체제를 강화하여 1940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무 위원제(집단지도체제)를 주석 중심제로 바꾸어 행정, 군사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김구를 주석으로 선임하였는데, 주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며 국군의 통수권을 행사하는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갖도록 했다. 주석은 곧 국가원수와 같은 존재로서, 주석이 정부의 행정권을 장악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Ⅲ. 결론
중국과 달리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의 경우 나라 전체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고 이 때문에 해방구를 가질 수 없었고 이에 민족해방군을 양성할 공간을 가지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지배한 35년 동안 민족해방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만주를 비롯한 중국지역이었다. 특히 민족의 해방이 가까워진 1940년대에 들어서는 만주지역의 민족해방투쟁이 약화되면서 그 주된 무대는 중국 관내지역으로 옮겨졌다.
1940년대 이후 중국 관내 민족해방운동은 정치단체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이 양립했고, 군사적으로도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과 독립동맹쪽의 조선의용군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바로 건국동맹이 형성되어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누리는 이러한 자유는 이들 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 운동단체와 독립 운동가들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임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은 각자 따라 떨어져 활동했으나, 그들 사이에는 통일전선이 어느 정도 성립되어가고 있었다. 이들 통일전선 지향 세력들은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한 후에도 좌우합작운동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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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인호 ,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나남출판, 2001
정병준, 「조선건국동맹의 조직과 활동」,『한국사연구80』, 한국사연구회, 1993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한국사50-전시체제와 민족운동』, 국사편찬위원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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