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박은식의 생애와 사관
- 최초 등록일
- 2009.06.23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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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현대사에서 백암 박은식의 생애와 역사관
그리고 저작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본 글
목차
1. 들어가며
2. 박은식의 생애
3. 박은식의 역사인식 성립배경
3-1 당시의 사회적배경
3-2 당시의 史觀들
4. 박은식의 역사인식
5. 박은식의 저서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6. 박은식의 사학사적 의미
본문내용
1. 들어가며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을 대표하는 역사가중 한명이며, 1901년 경술국치 직후 해외로 망명하여 1912년 해외 독립운동의 발판이 되었던 동제사(同濟社)의 총재를 역임하고 1925년 3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과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면직된 이승만에 이어 대통령에 추대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또한 『학규신론(學規新論)』을 저술하고 자신이 직접 오성(五星)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박은식은 항일언론의 선봉이었던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에 이어 향강(香江), 신한청년(新韓靑年)등의 주필ㆍ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또한 주자학을 공부하여 성균관의 후신이었던 경학원(經學院)에 초빙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을 연구하여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등을 저술, 주자학의 근대 유학사상에 양명학을 발전시킨 유학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박은식은 한국 근대사의 흐름에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박은식의 역사인식과 사학사적 의미에서의 위치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2. 박은식의 생애
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에서 서당 훈장 박용호(朴用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ㆍ백암(白巖)이며, 1911년 이후에는 무치생(無恥生)ㆍ태백광노(太白狂奴)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10세이후 부친으로부터 시와 문장을 배웠고, 17세부터 여러 학자와 지사를 만나 배움의 길로 나섰다. 20대에는 다산학파의 학자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방문하는 등 조선후기 실학에 접하였다. 1884년 화서(華西)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며 관서지방의 주자학자였던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 성암(誠菴) 박문오(朴文五) 형제 문하에 들어가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하여 1888년부터 1894년 까지 숭인전 참봉, 동명왕릉 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시 원주로 피신했다가 1989년 상경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