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춘곡
- 최초 등록일
- 2009.04.20
- 최종 저작일
- 2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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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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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작가 소개
2. 원문과 구절풀이
3. 어휘풀이
4. 요점 정리
본문내용
1. 작가 소개
정극인 (丁克仁 )
1401(태종 1)∼1481(성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광주(廣州) 출신. 진사 곤(坤)의 아들이다(≪국조방목≫에는 寅의 아들로 되어 있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여러 번 과시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태인으로 남귀(南歸), 초사(草舍)를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 자호 또한 이를 사용하였다.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자제를 모아 가르치고,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풍교(風敎)에 힘썼다.
1451년(문종 1) 일민천거(逸民薦擧)의 은전으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은일(隱逸) 6품(六品)을 받았다.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한성판관 성순조(成順祖)의 역권(力勸)으로 전시(殿試)에 응시, 급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 13명에 들었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하였다.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으로 특승되었고, 또 척불론을 펼치다가 하옥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다. 1470년(성종 1) 치사(致仕:나이가 많아서 관직을 내어놓고 물러남),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참고 자료
韓國詩歌史綱(趙潤濟, 乙酉文化社, 1954), 國文學全史(李秉岐·白鐵 공저, 新丘文化社, 1957), 壬亂前後 歌辭硏究(金東旭, 震檀學報 25·26·27 합병호, 1964), 不憂軒歌曲硏究(權寧徹, 國文學硏究 2, 曉星女子大學校 國語國文學硏究室, 1969), 湖南歌壇硏究(丁益燮, 進明文化社, 1975), 賞春曲과 그 所收文獻 不憂軒集을 살핌(崔康賢, 歌辭文學論, 새문사, 198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