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 민족주의자 홍명희의 삶
- 최초 등록일
- 2001.11.02
- 최종 저작일
- 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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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 홍명희의 성장과정
Ⅱ . 홍명희의 독립운동과 임꺽정
ⅰ. 독립운동활동
ⅱ. 임꺽정
Ⅲ . 독립 이후의 홍명희
본문내용
ⅰ독립운동활동
1918년 7월 19일 그의 아우인 홍성희와 같이 6년 간의 해외생활을 마감하고 귀국 길에 오른다. 귀국 이후 약 반녀 간이 벽초에게는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오붓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시기로 보인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기미만세 사건이 발생하면서 벽초의 고난은 다시 시작된다. 벽초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 운동에 참가한 뒤 3월 15일 귀향하여 시위계획을 세운다. 이 때 동참한 인사는 벽초의 서숙부인 용식, 태식을 비롯하여 아우 성희, 이재성, 김인수 등 그곳 인근의 유지 수십명에 이른다. 3월 17∼18일 벽초는 조선독립선언서를 집필하고 18일 밤부터 등사판으로 수백장의 유인물을 만들었는데 그 요지는 "대담하게도 최후의 일인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를 고취하는 문서"였다는 것이 복심법원의 판결문에 나타나 있다. 충북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3·19괴산만세시위는 그 이후 청주, 옥천, 영동, 음성, 진천, 충주, 보은, 제천 등 각 지역에 파급되어 대대적인 만세사건으로 확산되었으며, 3월 24일과 29일에는 다시 괴산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져 나라 빼앗긴 10여년의 울분을 산지사방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3월 24일 왜경에 체포된 벽초는 이듬해 1920년 4월 28일 청주 형무지소에서 만기 출감한다. 모처럼 단란한 시간을 보내던 벽초의 가정이 극도의 어려움에 처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