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란 명칭은 원래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시대인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1295)에 처음으로 라는 명칭이 보이는 데서 연유하며 조선 태조 때 지은 대명률직해 발문 등에는 등 명칭이 ... 이두는 향찰의 뒤를 이러 고려시대에 발달하였으며 조선에 들어 대명률직해에 의하여 그 용법과 용도가 확고해짐에 따라 널리 사용되고 한글이 창제된 뒤에도 여전히 공용문서 등에 투식으로
대명률직해의 규정에 의하여 팔목과 팔꿈치 사이에 매자를 각 1촌 5분의 네모안에 매획의 넓이를 1분 5리로 하여 글자를 새겨 넣었다. ... 깎아버리고 관제의 검사기를 사용하여 법대로 규격검사를 하여야 하며, 힘줄이나 아교 따위 같은 것은 덧붙이지 못하고 태형을 집행할 때에는 "매의 가는 편 끝으로 볼기를 친다"고 하였다(대명률직해 ... 이는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북경개척과 함께 평안도와 함길도의 이민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⑤ 사형(死刑) 사형은 형벌 중에서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대명률의 규정에 의하여
이러한 이두는 고려시대에 더욱 발달하였고 조선 초기에 간행된 김지(金祗)의『대명률직해』(1395)에서는 이두표기가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 원래 이두란 명칭은 신라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서(吏書)는『제왕운기』에, 이도(吏道)는『대명률직해』에, 이두(吏讀)는『훈민정음』후서(後序)와『세종실록』에 나 타난다.
당시 간범죄(姦犯罪)는 오늘날 강간, 강제추행, 성폭력, 간통 등의 범죄 내용을 포함하는 죄명으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대명률을 해석한 책으로 태조 4년에 출판하고, 세종 28년에 ... 대명률직해에서는 강간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미수에 그친 자는 장 100에 유 300리에 처하였으나 여자는 처벌하지 아니하였다.
(直解大明律》 권6, 호율(戶律) 남녀 혼인조(男女婚姻條) {) 직해대명률(1395;30권, 高士聚, 태조 4년) 은 중국 명나라의 형법전인 을 이두체로 ... 그러나 은 원문 그대로 직해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쓰여 졌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용어와 표현이 잘 나타나 있다. ... 그 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내려옴으로 인해 더욱 발달하게 되는데 조선 초기 에 이르러서 그 체계가 완성되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도 관공서와 민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