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비문정리
- 최초 등록일
- 2008.07.22
- 최종 저작일
-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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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의 비문을 정리해 놓은 것 입니다.
영일 냉수리신라비, 울진 봉평신라비, 단양 신라적성비, 진흥왕순수비(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목차
1.영일 냉수리신라비
2.울진 봉평신라비
3.단양 신라적성비
4.진흥왕순수비
(1)창녕비
(2)북한산비
(3)황초령비
(4)마운령비
본문내용
1.영일 냉수리신라비: 국보 제264호
①경북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에 사는 마을주민이 밭갈이 도중 발견하여 1989년 4월 문화재관리국에 발견매장문화재로 신고된 신라고비(新羅古碑)이다. 영일 지역은 신라가 동해안 진출 전초 기지였으며, 한동안 왜·고구려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인데 신광면은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碑)가 발견도니 냉수리는 부근 흥곡리에 군내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②고비(古碑)는 화강암 자연석 앞·뒤·위 3면에 새긴 삼면비(三面碑)로서 앞면은 글씨를 새기기 위해 다듬었으나 뒷면과 윗면은 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글씨를 새겼다. 따라서 매행별 글자의 수와 간격·크기가 일정하지 않은데, 앞면에는 12행 152자, 뒷면에는 7행 59자, 윗면에는 5행 20자등 총 231자가 새겨졌으며, 하단이 넓고 상단의 폭이 축소되는 형태로 앞면과 뒷면은 가로 65cm 내외, 세로 44~69cm 내외이며, 윗면은 가로 66cm 내외, 세로 27~30cm 내외이다.
③비문은 단단한 화강암에 새겼기 때문에 거의 마모되지 않았고 육안으로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자체는 대체로 해서체(楷書體)로 보이나 예서체(隸書體)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사체면에서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 봉평신라비(국보 242호)와 매우 유사하다.
④비(碑)에는 “신라의 사부지왕(斯夫智王: 실성왕?)·내지왕(乃智王): 내물왕)이 진이마촌(珍而麻村: 현재 돌막골로 불리고 있음)의 절거리(節居利)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敎)를 내렸다. 계미년(癸未年): 503년?) 9월 25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지증왕?) 등 일곱 사람의 각 부 대표가 모여 중신회의를 개최하고 전대의 두 왕이 절거리에게 재물을 얻도록 왕교를 내린 것을 의논하여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교시를 통해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아우인 아사노(弟兒斯奴) 혹은 아우의 아들인 사노(斯奴)가 상속하게 되며,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후에 재물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 것을 명령 하였다. 만약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자에게는 중죄에 처할 것이다. 전사인(典事人) 7명은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물어 이 사실을 기록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