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그는 진보적 개혁가인가 독선적 교만한 정치가인가
- 최초 등록일
- 2007.12.13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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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내용
제1장 천인무간(天人無間)
제2장 기묘사화(己卯士禍)
제3장 지치주의(至治主義)
제4장 문정공(文正公)
Ⅲ. 맺는말
본문내용
Ⅰ.서 론
조광조. 그는 누구인가?
성종 13년(1482년)에 태오나 중종 14년(1519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정치개혁자, 정치를 바로 잡으로다 실패하였던 이상주의자, 조광조 역시 유교의 사상으로 나라를 구하여 한 인물이다
그의 나이 33세 때 중종은 직접 과거를 시험장에 나아가 다음과 같은 알성문과 시험문제를 낸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이라도 가하지만 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성인이 어찌 헛된말을 하셨으리오. 그러니 그대들은 이를 낱낱이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조광조는 그 유명한 답안을 쓰기 시작한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 됨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지
우리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는지 여기서 작가는 혼란한 시대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펜을 통해 질문을 던지려 한다는 것이다.
조광조가 5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 곁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의 경세지략(經世之略)을 펼칠 수 있겠는가 함이다
우리 민족의 핏속을 흐르는 또 하나의 원형질인 유교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민족성을 파헤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의 위대한 사상가인 원효를 탄생시킨 것처럼 유교역시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사상가인 퇴계를 낳았다. 우리나라는 원효와 이퇴계라는 불세출의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했다.
이 책을 통해 조광조가 어떠한 인물이며 그의 정치관을 알아보겠다.
Ⅱ.본 론
제1장 천인무간(天人無間)
정암 조광조는 1482년 사헌부 감찰 조원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할아버지 조온은 조선 왕조의 개국 공신으로서 ‘2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좌찬성의 자리까지 올랐던 명신이었다.
조광조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부지런했으며 검소하였으며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평안도 지방관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이사하여 김굉필이라는 대학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 조광조에게 김굉필은 크나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광조는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열중하였고 그가 스무 살이 될 무렵에는 이미 그 명성이 서울까지 떨칠 정도였다. 이렇듯 김굉필 문하에서 단연 군계일학으로 두각을 나타낸 조광조는 벼슬길에 오르기도 전에 사림파의 영수로 부상하였고 스물세 살 때에는 유배를 당해야 했다. 바로 연산군 10년 갑자사화의 와중이었다. 즉 연산군의 생모 윤 씨가 폐위될 때 신진사류들인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등이 찬성했다고 하여 이들을 모조리 처형시키고 나머지 신진사류들은 삭탈관직 또는 유배를 보냈던 것이었다 .
스승을 잃고 유배를 당한 조광조는 현실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체험하였고 학문에 더욱 힘쓰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연산군이 축출되고 중종이
즉위했다. 중종은 사림의 소장 학자인 조광조를 등용시켜 현실을 개혁하기를 원했다.
참고 자료
유림1 / 최인호 / 열림원 / 2007.1